“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 :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새번역)

이 본문은 교회의 성찬식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예식문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참으로 익숙한 본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이 교회사에서 아주 극렬한 논쟁의 초점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논쟁점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장차 교회는 빵과 포도주로 하나의 예식, 곧 ‘성찬식’을 행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그 한 가지 해석입니다. 즉, ‘이것을 행하여’ 의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예식’을 행함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하라고 하셨다는 해석입니다.

더구나 예전적 교회들의 기도서를 보면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고 기도문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마치 ‘이것을 행하여’(‘Do this’)가 의미하는 것이 ‘예식을 행하여’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으로 번역된 점입니다.

여기에 맞서는 견해가, 행동론자, 또는 실천론자의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라고 하신 말씀을, ‘나를 기억하여 이처럼 실천하라’ 로 뜻풀이를 합니다. 즉,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듯이, 성찬을 나누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요, 구원의 십자가였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이 지는 십자가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하지만 이웃을 위해 더 수고하고, 더 섬기고, 더 희생을 바친다는 의미에서의 ‘십자가 다운’ 삶을 살자는 것이지요.

그런 극 대 극의 논쟁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궁금해 하실 것입니다. 간단히 대답해 드리면, 이 양자를 모두 흡수하는 교회의 해석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성찬식을 명하신 것인 동시에 행동강령으로 주신 말씀이었다고 풀고서는 논쟁을 끝냈습니다.

하지만,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가지의 본문의 이해가 생생하게 성찬의 정신으로 살아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찬의 예식문을 외우고 끝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결단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기도를 마치고, 감사성찬례의 말미에 이르러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ite, missa est” 즉, ‘나가서 사명을 행합시다’) 라고 파송례를 선포하는 것은, 예식이 끝났으니, 고맙다는 인사가 아니라, ‘이제부터 십자가를 지는 우리들의 삶이 시작된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기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 하나님, 저희의 성례전들이 허공을 치는 예식이 아니라 인간역사에 혁명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 성령께서 교회의 모든 예식과 예배들을, 살아 있는 구원의 역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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