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사람을 살리는 글을 쓰기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시편 137편 8-9절 :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새번역)

성경에는, 위의 본문에서 보듯이, 이런 끔찍한 저주의 글까지 있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이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고, 또 포로로 붙잡아 갔습니다. 유대인 포로들에게 고향 노래를 불러 보라면서 조롱하던 바빌론 사람들을 저주하는 글이 이것입니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 이 얼마나 끔찍한 저주의 말입니까? 그렇게 당했으니, 똑 같은 처지를 한 번 겪어 보라고 저주를 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어려서 할머니에게 한글을 배웠습니다. 시골에서 살아서, 문구점이 없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어디에 쓰는 종이인지, 누런 색깔의 종이를 가위로 잘라서, 실로 꿰매 공책을 만드셨습니다. 거기다가 “가, 나, 다, 라, …” 써 놓으시고, 네 살 난 저에게 그 아래 쪽에다 그대로 따라 적게 하셨습니다.

제가 한 쪽을 다 쓰고 나면, “잘 썼다” 칭찬하시고는 그 공책을 삿자리 밑에 깔아 두었다가, 다음 날 그것을 꺼내서 또 쓰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글을 배운 제가 제일 처음 쓴 글이, 교회 벽에다가, 낙서를 하는 못된 일부터 했습니다. 동네 아이 이름을 적고, 그 아이를 조롱하는 글을 쓴 것입니다.

글을 배운 제가 처음으로 더듬더듬 읽기 시작한 글은, 평양 공산정권이 곳곳에 붙여 놓은 선전문구 “이승만, 김성수 타도하자”, “영령한 인민군대” 그런 글들이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지만, 읽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년주일학교에 가면 성경책을 읽으라는 말을 늘 들었는데, 제게 성경책을 주지도 않았고, 아버지께서 읽으시는 두툼한 성경책을 펼쳐 보니까, ‘아래 아’ 모음이 수없이 섞여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고, 옛날 개역성경이어서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외솔 최현배 선생이 지은 ‘한글말본’ 책을 가지고 독학으로 한글 문법을 익혔습니다. 그런데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그때까지 일본어로 공문서를 작성했던 관청 직원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한글로 공문서를 작성해야 했는데, 한글을 미처 배우지 못해 쩔쩔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사인 아버지가 교회에 개설한 ‘한글교실’ 로 와서 한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서 깨우치고 학교에 가서 익힌 글을 가지고 8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글을 가지고 세상 이야기나 많이 썼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글은 별로 못 썼습니다.

그런데 복음성경(누가복음 8장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땅에다 글을 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글을 썼다는 말씀은 없어요. 또 땅에다 쓴 것이었기 때문에,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글을 읽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찔려 물러갔습니다. 간음현장에서 붙들어 온 한 여인을, 살벌하게 돌로 치려고 달려 들던 무리들을, 예수님께서 모두 돌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을 살려 내신 글을 땅에 기록하셨던 것입니다.

왜 저는 글을 배워서 지금껏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글은 쓸 수가 없었나, 가슴 아프게 반성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헛갈리게 하는 글은 썼지만, 또 비난하는 글은 썼지만, 용서도 빌지 않았고, 정정하지도 않은 채, 뻔뻔스럽게 다음 글을 또 쓰고 또 쓰고 지금껏 살아옵니다.

교보문고에 가면, 얼마나 책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책들 가운데 얼마나 사람을 살리는 글이 적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쓰기 편리하고 아름다운 글자인 훈민정음 반포 575 주년을 맞이합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게 감사합니다. 이 글로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글’ 을 쓰기로 오늘 다시 결심합니다.

<기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저희를 구원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말씀으로 저희를 감화하셔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을 삼으시는 성령께서, 저희에게 저주의 언어를 축복의 언어로, 살인의 언어를 사랑의 언어로 바꾸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이바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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