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선 칼을 마음에 품고 신앙생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10장 34-39절 : “34)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35)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인 것이다. 37)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9)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새번역)

복음성경에는 두 가지 상반된 선언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는, “칼을 주려고 왔다” 고 하셨으니, 앞의 말씀과 부딪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 두 가지 선언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이 아니지요. 누구의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를 준다’ 는 말씀이 맞고,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칼을 주고 가신다’ 가 맞는 것입니다.

가령, 임진왜란 때의 충무공 이순신 할아버지가, 우리나라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국의 제1유공자’ 였지만, 모두 바닷물에 수장을 당한, 일본 침략군의 입장에서는 ‘저승사자’ 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가족 내에 기독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가족의 생활수단이 모두 막히고, 혼삿줄도 끊어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가족 안에 있으면, 소위 ‘명예살인’ 이라는 방법으로 그를 죽임으로 가족들의 ‘살 길’을 열어가는, 샤리아법의 횡포가 있습니다.

가족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가는 것이 공공연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가계에 대해 최대의 위협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그저 평범한 일일 수가 없습니다. 가족을,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만드는 도전장일 수가 있습니다.

한국처럼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라 하더라도, 가족이나 이웃과의 연관이 어떠냐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큰 도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의 태도를 닮아 온유하고 온순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온순하게 순복할 수 없는 때를 만나면, 칼 같이 ‘아니오’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도 상대방도 영혼이 파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무력화시키려는 꾀임 앞에서 ‘아니오’ 를 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그의 저서 ‘The Radical Disciple’ (한글판 ‘제자도’) 에서 “우리(그리스도인)는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둘 다 피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 속에서 ‘radical’, 즉 ‘급진적’ 성격을 띠는 것이고, 때로는 목숨도 거는 자리에 서야 하고, 어중간한 입장이 아니라, ‘신랄한’ 입장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신랄해야 하는가 질문에, 존 스토트는, 아래에 열거한 이슈들 앞에서, 기독교인이 명확하게 ‘radical’ 한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 종교다원주의 앞에서 : 칼 같은 마음으로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최종점이며 유일하다는 주장을 거부해야 한다며, 누군가를 개종시키려는 시도는 ‘순진한 오만’ 이라고 비난합니다. 물론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예의를 지녀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을 계속해서 주장해야 합니다. 그분의 속죄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2) 물질주의 앞에서 : 칼 같은 마음으로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물질을 떠나서 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적 삶이 질식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검소하고, 관대하고, 자족하는 생활 방식을 익혀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물질 생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윤리적 상대주의 앞에서 : 칼 같은 마음으로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윤리적 상대주의’ 입니다. 가령, 혼전-혼외 동거, 동성애, 인위적인 낙태, 유전자 조작 등의 창조 질서를 깨는 일은, 장차 인간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 오는 일인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4) 나르시즘 앞에서 : 칼 같은 마음으로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뉴에이지 운동이나 그와 유사한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잠재력을 신봉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안을 들여다 보는 가운데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서, 구태여 다른 곳에서 구원자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나사렛 예수에게 구원을 빌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인류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질서 아래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는 만사에 온유하면서도, 때로는 칼을 품은 사람처럼 단호한 데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기도> 창조주 하나님, 인류의 모든 반역 행위들을 물리쳐 주시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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