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술의 제사를 받으소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시편 19편 12-14절 :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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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납’ 이라는 말은 ‘기쁘게 받아 주신다’ 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아 주셨다고 말하고 싶으면,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열납하셨다’ 고 표현합니다.

이 시편 14절에서,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 을 마치 나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열납하여 주시기를 바란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합니까?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시편 저자는 입으로 한 말 만이 아니고, 마음의 묵상을 포함해서, 그것이 모두, 언어생활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사이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경건한 기원의 시입니까?

저는 이 시편이 기록될 때의 언어생활과 오늘날의 언어생활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정말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작해야, 말로 내뱉은 말, 또 미처 말로 하지는 않았어도, 마음 속으로 남을 저주하고, 시기하고, 밉게 생각했던 모든 묵상들이 ‘언어생활’의 범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언어생활은 휴대폰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언어를 뿌리고 있습니다. 손가락도 빨라서 어떻게 그 많은 메시지를 입술로 하는 말의 속도 못지 않게, 언어를 남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영상의 언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음한 한 영상, 남이 저주스러운 상황에 빠지는 것을 즐기도록 만드는 영상, 할 것 없이 무한대의 죄를 마음 속으로 짓게 만드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마음의 묵상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우리들의 언어생활을 정화시켜 보십시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를 바라는’ 생활로 가다듬어 보십시다. 그래서 우리들의 입술로, 우리들의 휴대폰으로 하나님께 하루 종일 제사가 바쳐지는 날이 오기까지 힘써 봅시다.

<기도> 주 하나님, 저의 입술의 제사를 못 받으신지 오래되십니다. 저의 휴대폰의 제사를 못 받고 계신지 오래되십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의 언어생활을 통해서, 휴대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빕니다. 주 성령이시여, 도와 주시옵소서. 저의 마음의 언어가 제물이 될 수 있도록 정화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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