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19장 41-44절 : 41)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42)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43)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44)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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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인과관계의 총화로 이루어져 갑니다. 전에 있었던 일의 결과로 후일의 일이 있는 것이며, 왼편에서 일어나는 일이 오른편에, 그리고 오른편에서 일어나는 일이 왼편에 영향을 끼칩니다. 역사 속에서 모든 일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고무풍선의 껍질 같이 역사는 긴장 속에서 변화-변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후, 원근의 일들을 다 한 눈에 보고 계시는 분이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람한 돌들로 지어진, 마치 불멸의 것으로 보이던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도, 그것이 머지않아 당할 운명을 가슴아파 하셨습니다. 그냥 마음의 동정이 아니라, 온 몸으로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멸망의 예언은, 주후 70년에 티투스가 인솔한 로마군에 의해서,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운명을 예수님께서 안타까와 하시며 예언하신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서양 모든 인류 역사의 운명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물이셨습니다. 물론 21세기에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운명을 보시면서도 그때 눈물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 우리를 위해 슬픔의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여기 단 한 가지 언급된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44절의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까? 2천 년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찾아오셨고, 그후 지금까지 줄곧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 오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오신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표현이 부드러울 뿐이지,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늘 문전박대를 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고자, 베들레헴 인근의 모든 어린아이들을 죽였고, 고향 땅 나사렛에 가셨을 때에, 절벽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 했고,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은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신성모독죄’, ‘민심교란죄’, ‘왕 사칭’ 이라는 어거지 죄명을 씌워 십자가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푸대접이지 않았습니까? 그건 예루살렘에 살던 2천 년 전의 사람들을 비롯해서, 오늘날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서도 일어나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령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깊은 신음으로 (롬8:26) 슬퍼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평화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이사야59:8) 즉, 다가오신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제게 오시어, 다시는 박대 받으시는 일 없이, 온전히 좌정하고 계시옵소서. 저의 주인으로 임하시며, 제 안에 온전한 하나님의 평화가 있게 하옵소서. 지금까지의 푸대접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한 분 만을 저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