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21장 33-41절 : “33)다른 비유를 하나 들어보아라. 어떤 집주인이 있었다. 그는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34)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가까이 왔을 때에, 그는 그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35)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다. 36)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농부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37)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38)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끼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39)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 40)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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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결정을 하실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외아들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알고 계셨습니다. “내쫓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39절) 것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얼마나 장엄한 결정을 하신 것입니까? 자기 아들이 죽임을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사지로 보내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바로 이것이 ‘성탄’을 앞둔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들려 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보면, 장차 당하실 일을 너무나도 잘 아시고 계셨던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그러시면서도, 인간(나+우리) 세상에 오셔서, 인간(나+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그토록 애써 복음을 전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두 팔을 벌려 달리셨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의 전모를 미리 내다보셨던 분이, 이 일을 당하신 희생자가 몸소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에 ‘아기 예수’만 바라보지 말고,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가 십자가에 속죄양으로 달리시기 위해, 약 33년의 일생을 ‘속죄양으로 사신 메시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70년대 초에 ‘전태일’ 이라는 분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출석하던 감리교회에서 저와 주일예배에 매번 나란히 앉곤 했던 분이 전태삼씨라는 그의 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비참했던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누군가는 생명을 바치고 근로자의 열악한 상황을 세상에 고발할 수가 있어야 한다며, 늘 자결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광장시장 한 복판에서 기름을 몸에 붓고 분신자살을 한 것입니다.
물론 근로자의 복지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겠다는 사람의 결의와, 구세주로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동일시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나+우리)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깨우치는 일을 위해, 복음을 맨 처음 전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도 목숨을 바치셨고, 수많은 복음전도자들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는 다시 ‘대속의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아기 예수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들, 곧 ‘저와 저희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엄숙하게 성탄을 기념하려 합니다. 저희에게 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바라볼 눈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심정을 마음 깊이 깨닫게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