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1장 39-45절 : 39)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41)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에, 아이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42)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43)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44)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45)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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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가슴으로 성탄절을 지킵시다.
본문에 보면, 세례 요한을 태중에 품고 있는 엘리사벳이, 아기 예수를 태중에 품고 있었던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에, 아이(세례 요한)가 태중에서 ‘뛰놀았다’ 고 했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태중의 아이가 뛰놀 때의 느낌을 모릅니다. 다만 짐작하기로는,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의 합격 통보를 받는 순간의 감격 같은 것에 비길 수 있을까요?
오라토리오 ‘메시아’ 의 작곡자인 헨델이 할렐루야 곡을 금방 썼을 때에, 그의 집사가, 헨델이 너무 침식을 잊고, 작곡에 심취하고 있음을 염려하여, 그의 작업실로 들어가 보았을 때에, 그는 피아노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건 내 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들려 주신 곡입니다” 라고 외치면서..
그토록 감격 속에 탄생한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은, 모든 듣는 사람에게도 같은 감격을 주고 있어서, 초연 때에, 영국의 왕 조지 2세가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서서, 연주가 다 끝나기까지 선채로 들었다고 전하지 않습니까?
어렸을 적에는 성탄절이 되면 ‘뛰는 가슴’으로 맞이했다고 회상됩니다. 성탄절에는 뭔가 주일학교에서 이벤트가 있었고, 가령 그것이 연극이면, 그것이 음악 연주면, 그것이 무슨 발표를 하는 일이라면, 준비를 위해 한 달 이상 법석을 떨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탄일 아침이면, 365일 만에 찾아오는 신비로운 존재,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든 어린이들이 페스티벌을 맞이하는 기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festivity (감격어린 축제) 를 잃고 말았습니다. 물론, 다만의 축제로 지내던 폐습은 없애야 했지만, 그렇다고 감격 마저 없어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리아의 몸에 품겨, 문에 들어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던 제사장 사가랴의 일가족이 가졌던 그 감격을,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우리도 가져 보는 것이, 성탄을 뜻깊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감격이 어떤 공식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감동의 말씀으로, 어떤 이에게는, 아기 예수님의 말구유를 찾아 경배하듯, 누군가를 찾아보는 일로, 또는, 지난 세월 등지고 살았던 누군가와 화해하는 일을 통해서, 또는 지금까지 기도 속에서만 외웠던, 복음을 들어야 할 그 어떤 사람 앞에 ‘이제는 주님을 영접하기를’ 권고하는 일로, 금년의 성탄절을 감격 속에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를 감격케 했던 어느 해의 성탄일 아침을 소개합니다. 작곡가 나운영 선생님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등사기 프린트’로 갓 소개되었던 1959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노래를 불러보다가 그만 엎어져서, 한참을 은혜 가운데 있었습니다.
“가난한 여인, 가난한 어머니, 한 아기를 낳았으나, 누일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뉘셨네. 흰 강보로 싸서. 말구유에 뉘셨네, 말구유에 뉘셨네.”
음성으로 들려 드리지 못함을 아쉬워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러 오셨을 때에 온 하늘에서 감격스런 축제가 있었듯이, 저희 마음에도 그 감격이 저희 가슴을 뛰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성취를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