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가복음 7장 24-30절 : 24)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27)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9)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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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5만원 권 지폐를 디자인 할 때에, 누구 얼굴을 실렸으면 좋겠느냐는 논의가 나오던 때였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뒷켠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가장 공훈이 있는 ‘한국의 어머니’ 상을 담은 미술 작품 하나를 택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론은 ‘신사임당’으로 났지만, 그는, 말하자면, 영의정의 어머니로서 대접 받을 만큼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 적합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닮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나라마다 “당신은 개 같은 사람이요” 라고 말하면 어떤 느낌을 받는지 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단히 치욕적인 표현으로 들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로부터 몽골 사람들은 개를 자기 집안 식구로 여기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첨꾼’, 또는 ‘윤리도덕도 모르는 자’, 또는 ‘먹여만 준다면 무슨 천대를 받으면서도 맹종하는 추잡한 인간’ 으로 이해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가 보기에 근동지방에서는, 우리나라 처럼, 상대방을 아주 격하해서 말할 때에 ‘개 같은 X’, ‘개 XX’ 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민족을 존경하는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방민족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을 비롯해서 페니키아, 시리아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개 떼’ 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표현을 사용하실 정도면, 얼마나 보편적인 표현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딸을 시달리게 하고 있는 귀신을 쫓아 달라고 부탁하던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녀들에게 먹일 음식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소” 라고 말씀하실 때에, 자기 자존심을 깨끗히 포기합니다.
“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먹다 흘린 부스러기는 개들이 먹고 살지 않습니까?” 이렇게 고분고분 응수합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딸이 귀신에게서 놓여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만 매어달리면 내 딸의 귀신을 물리칠 수가 있다’ 는 간절한 믿음에 꽉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울컥했을 것 같습니다. 딸을 위하여 자기 자존심을 그토록 짓밟히면서도 얼마든지 참으면서, 간곡하게 매어달리고 있는 이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곧 단호한 음성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가 보시오. 당신 딸이 나았소.”
우리 모두가 진정 본받아야 할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딸이 귀신에게서 벗어난다는데, 그 엄마가 못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장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온갖 수치와 모욕을 참으시며, 자존심을 버리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희의 별 것 아닌 자존심을 넘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배우도록, 성령이여,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