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4장 24-30절 : 24)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26)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 만이 고침을 받았다.”
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9)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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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다수’를 형성하는 본능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기득권 세력을 이루게 되면, 감히 하나님에게까지 대어드는 세력이 되곤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고향동네 사람들의 기득권세력’ 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기득권세력들이 있습니다. ‘다수의 인종’, ‘다수의 민족’, ‘우수한 무기의 소지자군’, ‘부자들의 결탁’, ‘주먹들의 결탁’, ‘공산당’, ‘긴가방끈들의 결탁’, ‘동창회’, ‘종친회’, ‘십자군’, ‘무슬림’, ‘나치독일’, ‘대동아공영권’, 등등.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장치로 기득권세력을 형성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 기득권세력을 형성하여, 서로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다니는 것인가, 아니면, 기득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인가를 이 사순절에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 봅시다.
예수님은, 그의 고향인 나사렛의 ‘향촌기득권자’ 들의 횡포로 죽을 뻔했습니다. 그들의 몸싸움에서 홀몸으로 밀리워, 정든 고향 땅의 한 절벽에서 떨어질 뻔했던 것입니다.
제주도 서귀포가 시로 승격해서 아주 광범위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피란민 소년으로 처음 갔던 곳은, 지금은 서귀포로 편입된 토평이라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4.3 사태 직후였으므로, “평양서 온 피란민”이라는 개념이 그들에게 아주 낯설었습니다. “왜 그런 낙원(?)을 버리고 떠나 왔느냐?” 고 저희 부모에게 물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동네 아이들이 떼를 지어 피란민 아이들에게 몰매를 때리려고 했습니다. 저도 그런 일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간신히 모면했지만, 몹시 당황했었습니다. 다시는 동네에 나가서 놀지 못했습니다.
저는 소위 ‘삼팔따라지’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간단히 ‘따라지’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뭘 손해 봤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쩐지 차별받는 감이 들곤 했습니다.
요즈음에는 “그 사람 1번 찍었을걸?” “아냐, 2번 찍었을 거야” 이렇게 기득권 세력군을 양분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애에 1번에 찍을 수도 있고, 2번에 찍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각자는 자신이 보호받을 기득권 집단을 정하고 나면,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향하여, ‘정의’의 이름으로 강인한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까? 그러고서도 기독교인입니까?
아아, 무정합니다! 너, 나 없이, 세상 사는 인생들은 모두가 어느 기득권에 붙어 패싸움의 주역으로 살고 있다니..! 그리고는, 우리 속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마저, 당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마저, 죽음으로 내몰려고 덤비고 있으니..!
<기도> 주 예수여, 주님께서 철저히 비기득권자로 세상을 사신 것처럼, 저희도 비기득권자로 세상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도리어 비기득권자를 돌보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