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화요일 – 십자가로 일관하신 예수님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1장 18, 22-24절 :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22)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3-36절 :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 32)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당하실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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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 자유당 독재는 만용을 부려, 그해 3월 15일 대한민국 제4대대통령선거에서 극심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습니다.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마산의 김주열이라는 고등학생은 시위도중 경찰에 체포되어 모종의 고문을 당하던 끝에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한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얼마 후에 마산 앞바다에 그의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눈에 총류탄이 깊이 박힌 채 물에 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잔혹하게 죽은 그의 시체의 사진이 부산일보에 게재되었고, 그후 도하 각 신문에 이 사진이 실리게 되자, 너 나 없이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습니다. 이것이 그 해의 4.19 혁명이었습니다.

한 어린 학생의 죽음이 왜 그렇게도 큰 사회변혁의 동력이 되는 것인가가 저는 궁금했습니다. 누군가의 글에서 “죄없는 천진난만한 어린 생명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역사변혁의 동력이 되었던 것” 이라고 읽었습니다. 비록 힘없는 학생이지만, “그는 죄가 없기 때문에 그의 손으로 하늘을 떠받칠 수가 있었던 것”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 이 삼 세의 어린 소년이었을 때에,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세포리’ 라는 곳에서, 십자가형을 당해 죽은 떼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독립군으로, 세계 최강인 로마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채 체포된 잔류병 천 여 명을 세포리 사면으로 뻗은 도로에다 모두 십자가에 달아서 죽였던 일이 역사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이 치떨리는 처형의 현장을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터인데, 이 십 리 길 밖에 안 되는 나사렛에 사시던 우리 예수님께서, 비록 어린 나이였을지언정 세포리 현장에 가셔서, 이를 목도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 될 것인지를 분명히 보고 자라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십자가를 향하여, 20 년 동안 줄곧 달려 오신 것입니다. 죄 없이 사셔서 거룩하고 온전한 제물이 되셨으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구체적으로 전하신 메신저의 역할을 3년 동안 온전히 담당하셨고, 제자들을 양육하셔서, 이 사명을 계속 수행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다 부족하지만,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눅9:23)

<기도> 주 하나님,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열쇠’ 이심을 천하가 알게 해 주셨음을 감사 드립니다. 저희도 저희 몫에 태인 십자가를 사양치 말게 하시고, ‘산 제물’로서의 역할이 필요할 때에, 이를 잘 감당하게 일깨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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