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1) 마태복음 17장 14-20절
[14] 그들이 무리에게 오니,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15]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18]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 [19] 그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께 다가가서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2) 로마서 3장 27-31절
[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28]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9]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31]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 * * *
본문 (1)에서 보는 ‘믿음’은,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단어에 ‘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1)에서, 자기 아들의 간질병을 고쳐 달라고 아기를 데리고 부탁하러 왔던 아기 아버지가, 예수님은 못 만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스승을 대신해서 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었지만, 제자들이 쩔쩔매기만 할 뿐, 고치지를 못 하는 것을 보고 답답해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고치지 못하더군요” 하면서 핀잔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라고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똑 같은 꾸중을 들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확신’이라는 ‘믿음’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때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복음성경에, 예수님의 많은 치유가, 환자나 환자의 보호자의 믿음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실제의 경우, 인간의 ‘확신’이 오히려 병을 낫게 하지 못하고, 병이 도져서 죽게 만드는 경우를 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병이 들면 확신으로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병원의 의사가 고쳐 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병원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 아닙니까?
기독교의 전통적인 구원관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딤후3:15)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본문 (1)에 나오는 ‘확신’의 믿음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 (2)에서 말하는 ‘신뢰’ ‘의뢰’ ‘위탁’의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가령, “너는 네 돈 많은 아버지만 ‘믿고’ 평소 일을 안 하는구나”, “그 사람은 자기 뒤의 큰 주먹을 ‘믿고’ 시장판에서 거들먹거린다” 라는 표현에서 사용하는 ‘믿음’의 용법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의 믿음 훈련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일련의 훈련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서 말해 봅시다. 두 살 배기의 어린 아들을 둔 아기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나가서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끄럼틀의 계단을 다 올라간 아들이 돌연 그 2미터 되는 높이에서 자기 아버지 품으로 뛰어내리고 싶어 합니다. 아버지는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 재미 있겠다’ 생각하고, 자기 아들에게 뛰어내리라고 두 팔을 벌립니다. 그의 아들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내려 뛰어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27년에, 제 할머니는 촌에서 농사 짓던 49세 과부였습니다. 그때 한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예수 믿어야 집안이 바로서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뒷뜰 사당의 제사 기물들을 모두 꺼내서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그 날로 문중 동네 어른들에게 혼쭐나고, 동네에서 추방되었습니다.
2녀 3남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평양으로 정처없이 떠나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장래 일을 모두 맡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 구원의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할머니였습니다.
1950년 12월 초, 평양서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목사인 아버지는 다시는 공산당 치하에서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갓난아기를 포함한 어린 아들 다섯을 데리고 남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것은, 저희 일곱 식구가 손에 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손에 뭔가를 들고 떠났다가는, 저의 어린 동생들을 놓칠 위험이 있다고 보고, 일동이 맨 몸으로 방한복만 차려입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희 온 가족은 무사히 대한민국에 와서 지금껏 살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부모님이었습니다.
구원을 위한 우리들의 ‘믿음’ 은 본문 (2)에 나오는 ‘의지하는 믿음’ 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의지하는 믿음’을, 본문 (1)에 나오는 ‘확신’의 믿음으로 지닌다면, 더 할 나위 없는 ‘최고의 믿음’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칭찬을 받을 만한 믿음이 되리라고 봅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저희가 늘 살게 하옵소서. 이 하나님께 모두 맡겨 올리는 믿음을, ‘확신의 믿음’ 으로 가지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믿음으로 이 불신의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