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제자를 다시 만난 부활의 예수님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누가복음 24장 36, 41-43, 46-48절. [36]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 [41]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42]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다. [43]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 * * *

( 1 )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밤, 열한 제자는 뿔뿔이 도망쳤다가, 다시 예루살렘의 한 익숙한 집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했는데(눅 24:36), 아마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사실인가를 말하고 있었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예고없이 들어오셔서, 인사했습니다. “샬롬 레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평화’ 라는 말은 ‘화해’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A와 B 사이에 평화가 있으려면, A도 하나님과 화해하고, B도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한 분이시므로, 다만 제자들이 하나님께 회개할 때면, 그들은 모두 평화 안에 있게 됩니다.

스승의 체포 현장에서 도망쳤던 제자들은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특별히 대제사장의 집뜰에서, 예수님의 제자임이 틀림없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에, “맹세코 나는 그를 모르오” 라고 잡아떼었던 베드로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화’의 인사 한 마디로, 모든 제자들의 허물이 용서되었습니다.

( 2 ) 1970년대에 노동삼권의 확립을 위하여 분신자살한 전태일을 추앙하던 이들이, “전태일은 우리들 속에 부활하여 계시다” 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말은 그럴 때에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정신’이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부활이라는 말을 쓰려면,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용어를 사용하든가, 아니면, 다른 사전을 출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셨습니다. 완벽한 죽음을 거친 후에, 완벽한 인간 몸을 회복하신 부활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음식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참 죽음을 거친 후에, 참 부활을 하신 사실을 영원토록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음식을 잡수신 것입니다. (본문 41-43절)

( 3 )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신 자리에서, 교회의 영원한 화두를 주셨습니다. ‘선교(전도)’ 였습니다. 풀어서 말씀하시기를,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는 일” (본문 47절) 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민의 죄 사함’ 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일을 위해 공생애 3년을 사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이 일의 지속적인 파급을 위해 부활-승천 이후에 성령을 보내 주셨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이래 식민지 확장과 흑인노예, 플랜테이션으로 거두어 들인 엄청난 재물로 유럽의 소위 ‘기독교 국가’ 내에 대형 교회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들의 군사-경제력의 과시를 위해 교회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힘을 잃어, 대부분의 출석자들이 떠났고, 그들의 ‘침략 기념행사’ 들은 끝났습니다.

<기도> 구원의 하나님, 이제 인류에게 성령으로 임하셔서,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감화시키시고, 땅끝까지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복음’ 이 누룩처럼 온 세상을 변화시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