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요한복음 3장 13-18절.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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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 단락의 주제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 이란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 아니면,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하는 사람? 아니면,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인식’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 때문에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까지 포괄하는 범위가 큰 질문으로 보입니다.
저는 장로교의 교인으로 유아세례를 받은 후 자라나서, 열여덟 살 되었을 때에, 교회에서 입교문답을 했습니다. 아마 제가 받았던 질문 가운데는 “예수가 당신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믿습니까?” 이런 질문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저는 “네, 그렇게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 질문에 이어서 저에게 “그렇게 믿기 때문에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면, 저는 아무 대답을 못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 예수를 구세주로 제 마음에 모셨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 마땅히 고민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민이 진척되지 않은 채로, 입교문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나이가 아직 10대를 벗어나지 못한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저의 기도생활, 저의 말씀묵상, 저의 예배생활, 저의 헌신, 저의 진로에 대한 계획, 저의 주변 정리 등에 관해서 뭔가 애를 쓴 내용들이 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변변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교회의 성직을 맡고서도, 기독교 서적에 기록된 내용들을 뒤적거려 말씀을 준비하려 했고, 제가 말씀을 붙잡고 씨름한 흔적은 별로 없는 말씀을 설교라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초심자는 다 그렇다”는 말로 제 스스로를 달랬고, 타당화했습니다. 통절하게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말씀을 전할 기본자세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노년에 이르러 제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은 “제가 하나님을 믿는가” 라는 질문보다, “하나님께서 저를 믿어 주시는가요” 를 묻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신학을 공부했던가?” “설교를 통해서 내가 회중에게 무엇을 전하려 했던가?” 심지어 “하나님께서 저를 강단에 세우신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옳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은, 성직안수를 받고도 오랜 기간이 흐른 뒤에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성령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라고 저는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관념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격을 걸고 믿고 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저희 인격이 새로 태어나고, 신앙인격으로 자라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명자로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