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요한복음 6장 10-15절. [10] …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이 앉았는데, 남자의 수가 오천 명 쯤 되었다. [11]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은 부스러기를 다 모으고, 조금도 버리지 말아라.” [13] 그래서 보리빵 다섯 덩이에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께서는, …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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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전후에, 우리나라의 헌법이 작성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독립된 공화국으로 설립되기까지,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평신도 기독교인들의 공헌이 다대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국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기독교정당이 세워질 만한 타당성이 있다는 말을 교회 안팎에서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의 활발한 기독교 정당을 닮은 우리나라의 정당은 탄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령 정당에는 ‘정강’(정치적 강령)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정당이 철칙처럼 지켜야 하는 정치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운 정당이라면 이치상 성서에 기반을 둬야 하는데, 정당이 표방하는 정강이 성서의 가르침과 배치될 때에는, 어느 쪽 의견을 앞세워야 하느냐 하는 까다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정치란 정치적 수완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간혹 ‘권모술수’라고 혹평되는 ‘필요악’일 수도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감행할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정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수가 있고, 사형집행이라든지, 폭동진압의 경우 발포하는 지휘책임도 져야 할 때가 있는데, 기독교의 이름으로 어떻게 이런 폭력을 감행할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 교회 안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이슈입니다.

예수님을 유능한 분으로 알아 모신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그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까닭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필요로 했던 메시아의 컨셉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서의 메시아였던 듯합니다. 그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동의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관해서는, 그들은 그것은 ‘먹을 것을 해결한 후의 문제’ 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요사이 간혹, 기독교권에서 정치적 행동을 시도하려고 꿈틀대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성직자)는 교회의 본분인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집중하신 메시아 예수님을 본받아, 성직자에게 맡겨진 본분에만 충실할 것을 권고합니다. 교회의 직함을 가지고 정계에 투신하려면, 교회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정계도 어지럽히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오늘날과 같이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 창조의 원리를 밝히는 예언자로서의 구실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정정} 어제 글 가운데 ‘성인들의 편모를 살피게 되었는데’는 ‘성인들의 면모를 살피게 되었는데’의 착오임을 밝혀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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