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누가복음 24장 14, 17-19, 24, 26, 32절. [14]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 [18] …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24]…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 “…[26]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32] “길에서 …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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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에 해가 기울고 있을 때였습니다. 두 장정이 예루살렘을 서둘러 떠나, 날이 어둡기 전에 30리 길을 걸어, 엠마오에 도착하려고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동작 못지 않게, 그들의 마음이 바빴습니다. 어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태양처럼 받들던 스승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총독의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아, 십자가처형을 당했는데, 이 두 사람의 신변이라고 안전할 리 없다면서, 길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믿기 힘든 소식 하나는,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여제자들에게서 나온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수많은 예수님 추종자들에게는 진정 놀랍고 흥분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돌아가신 스승 예수님께서, 만약 소문대로 부활하시는 날에는, 그 거들먹거리던 대제사장들, 그리고 죄없는 예수님께 사형언도를 내렸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까지 벌벌 떨 터인데..
그 여제자들의 말을 듣고, 주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불이 나게 무덤으로 뛰어가 무덤 속을 들여다 봤다는데, 과연 무덤 속에 뉘어 있을 예수님의 시체는 온데간데 없고, 다만 시체를 감쌌던 삼베 자락만 곱게 개켜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조속한 낙향을 결정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뭔가 분명한 사태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부활 소문에 속을 필요 없다.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 안전하다.’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대학 학부를 신학과에 다니기로 결정하고, 4년제 대학을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신학과 학부생은 전공과목을 배우지 않고, 대체로 세 학기는 교양과목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2학년부터 전공 신학과목의 개론학을 수강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학과목의 모든 개론학에서 그나마 제게 있던 신앙심은 산산히 깨어져 버리고 말아서, 간신히 실낱같이 남아 있는 믿음을 다시 추스려 신학공부를 계속해 보려다가는, 또 제 신앙심이 흩어지고 해서, 2학년 말에는 신학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에 이르렀습니다.
저같은 희생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제가 기여할 것이 없겠는가 생각하다가, 장차 이런 글을 써 보겠다고 집필안을 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라는 미궁으로부터의 탈출’. 이런 논픽션 스타일의 픽션을 써 보면 좋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후 저의 신앙적인 방황이 시작되었는데, 아마 13년 동안 제 영혼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되었습니다.
이윽고 방황의 뒤끝에, 제가 ‘비합리 사고’ 라고 지탄했던 생각들이 오히려 저를 붙잡아 하나님을 만나게 인도했으며, 저의 정든 집,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고 단언하고 떠났던 교회로 저는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자 글로바처럼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고, 사도 바울처럼 하늘로부터 내려 비치는 강렬한 빛을 보았거나,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제 영혼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 방황하던 영혼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 은총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로 하여금, 엠마오 길에 서서, 신앙에 상심한 자들을 만나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인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