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히브리서 4장 14-16절, 5장 5절. [14]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 [5: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 * *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단 한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은 거룩한 곳이었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모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무리 먼 곳에 사는 사람들도 일 년에 몇 번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고, 또 그것이 그들의 영광스런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경계가 있었고,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여자들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경계가 있었고, 대제사장이 아니면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는 지성소 휘장이 있었고, 거기도 대제사장이 아무 때나 들어가지 못하고 특정한 때에라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문이 열리는 날, 문을 열어 주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물, 곧 제사 제물이나 헌물, 헌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자기 독단적인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속죄의 예배는 제사장들의 집례 아래서 드릴 수 있었습니다.
뭐 그런 종교제도가 다 있느냐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할 수 없었다면, 우리 역시 예루살렘 성전 뜰에 간신히 들어가, 이방인의 지정된 공간 이상 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막힌 담과, 경계와 휘장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까지 직통할 수 있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 27:50)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까지 갈 필요도 없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제 친구 방아브라함 사제나, 이슬람 제도권에 묶여 있는 제 친구 악ㅂㄹ와 핫ㅅ도, 그저 그들이 앉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면, 대뜸 은혜의 보좌 앞에 닿습니다.
제 친구 사제 한 분은, 그가 기도할 때면, 꼭 “은혜의 보좌”를 언급하곤 합니다. 그가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들의 구박을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고생고생한 끝에 사제가 되고, 평생을 목회와 선교활동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려고 엎드리기만 하면, 그 도달하기 어려운 ‘은혜의 보좌’가 바로 앞에 있으니, 자기가 얼마나 복 받았나, 감격해서, ‘은혜의 보좌’ 라는 말을 수도 없이 외우게 된다고 했습니다.
<기도> 은혜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 저희가 언제 어디서든 ‘주 하나님’, 존귀하신 이름을 부르는 곳이면 저희를 만나 주시는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저희가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하는 이 복된 시간을 사랑하고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