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장 17-18, 22-24절 (새번역)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서,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18] 장로들이 오니,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아십니다. … [22]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4]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 * * *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 엘리트 청년으로, 예루살렘에서 장래를 촉망받던 이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던 때에,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짐작하기로는, 그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어도,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하라고 빌라도 법정에서 소리를 질렀던 무리들과 한 패거리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사도행전 7장 58절에 드디어, 그의 개명 전 이름인 ‘사울’이 등장합니다. 스데반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 사울에게 맡겨 두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에,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그 진두지휘를 사울이 했습니다.

나중에 사울이 회심하여, 복음전도자 ‘바울’이 되었어도, 자기 눈앞에서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테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도, 복음에 충성을 바친 스데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의 세번째 선교여행을 계획하면서, 이제는 반기독교의 아지트를 향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선교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로마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될 것이 틀림없어도, 거기서 자신의 로마시민권을 주장하여, 황제의 재판을 요청하면, 로마까지 가게 될 것인데,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자신을 산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후, 먼저 간 스데반을, 장차 하늘나라에서 기쁨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셨습니다”(고전 4:9) 라고 자신의 죽음에 관해 힌트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1956년 세계적인 월간 포토잡지 ‘LIFE’에 짐 엘리엇이라는 이와 그의 동료 선교사 4명이 남미 에콰도르의 식인종 원주민인 아우카족이 사는 지역에 들어갔다가, 창과 도끼로 살해를 당한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해설기사의 제목은 ‘이 무슨 쓸데없는 인력 낭비인가?’ 였습니다. 왜 그따위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던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은, 이 기사에 대항하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제 남편이 선교를 위해 신학공부를 했고, 선교 전문교육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배운 것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결코 헛죽음이 아닙니다.”

엘리자벳은 몇 년 후, 남편의 뒤를 이어, 아우카족을 향해 몇 명의 동료들과 선교사로 갔습니다. 거기서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신학교의 제1기 졸업생으로 처음 성직 안수를 받은 사람이, 그의 남편을 도끼로 찍었던 바로 그 아우카인 형제였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성령께서는 저희 성도들을 모두 해피 엔드로만 생애를 끝맺게 인도하는 분은 아니심을 압니다. 성령께 매인 사람들에게, 큰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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