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 세례 요한, 그리고 ‘태아’ 예수의 교감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누가복음 1장 39-45절 [39]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에, 아이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42]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45]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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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태아는 아직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그들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고, 그들에게는 언어도 없으며, 개체 인격으로 취급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런 착각을 완전히 고쳐 주는 본문이 나옵니다. 오늘의 본문입니다.

태아인 세례 요한이, 또 역시 태아인 아기 예수를 반가이 맞이하는 장면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이(태아 세례 요한)가 그(엘리사벳)의 뱃속에서 뛰놀았다”(본문 40절)고 했고, 또 “그대(마리아)의 인사말이 내(엘리사벳의)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태아 세례 요한)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본문 44절) 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해석으로 제한하려는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의 내용을 말씀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태아들은 수시로 태중에서 움직이는데, 다만 그날 방문한 마리아가 집문을 들어서며 인사할 때에, 엘리사벳이 뱃속에 가진 태아의 태동이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는 뜻일 것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말씀은 오류도 없을 뿐더러, 과장이나 허구가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쓰여진 대로 이것이 사실임을 믿습니다. 즉 태아들에게도 상호인식이 실재하며, 특별히 영적 존재이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영적 인식은 무엇보다 선명할 것임을 믿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마리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던 엘리사벳이었으므로, 마리아의 잉태는 메시아를 잉태한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받을 때에, 그의 반가운 감정이 태 속의 아기 세례 요한에게도 전달된 것이라고, 구태여 해설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태중의 아기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오로지 ‘몸 동작’(태동) 뿐이므로, 그의 반가움을 태동으로 표현했을 뿐, 태 속의 양수 속에서 무슨 자기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하면서 태아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면, 이것은 실로 대단히 위험한 단견이고, 또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불경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태아이기로, 그들 중 한 분은 성령으로 잉태된 ‘메시아’이시고, 또 한 분은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러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시는 ‘태아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또 이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어도, 많은 어머니들의 태 중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려고 ‘태중 인생’을 하루 하루 준비하고 있는 수많은 태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아들은 엄연히 독립된 인격을 지닌 생명체들입니다. 물론 어머니의 관리와 양육 아래 있기는 해도, 탯줄로 영양을 공급받고 있을 뿐, 어머니와 별개체의 인격을 이미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비롯한 그 어떤 이의 결정으로도 그들의 생명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순간 새 생명이 시작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이 땅에 수태되는 태아들의 생명을 무슨 이유로든 죽일 정당한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게 하옵소서. 태아였던 세례 요한과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서 태아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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