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주신 칼은 어디에 쓰는 것인가?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10장 34-39절 (새번역)

[3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35]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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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날선 언어로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칼을 주러 오셨다” 고 하신 것입니다. 치열한 전투에 나서는 투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누구와 싸우라 하십니까? 전혀 반역의 칼을 들 수가 없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을 향해 칼을 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칼을 들라는 것입니까? 주(예수)님을 위하여, 칼을 들라 하셨습니다. 과연 주님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가장 반역할 수 없는 부모 자식 간이라도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거부해야 하고, 단호히 끝까지 대적해야 할 원수들을,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제자도’에서 선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기독교를 붕괴하려고 침투하는 세력이 누군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며, 무슬림을 믿든, 불교를 믿든, 그 밖에 어떤 종교를 믿든,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기독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니, 절대로 용인하지 말라 했습니다.

둘째는 물질주의입니다. 인간은 물질이 없으면 못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더 소중한 것이지, 물질을 추구하려고 하나님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세째는 상대주의 윤리입니다. 이를 상황윤리라고도 합니다. 선의 개념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는 윤리관입니다. 일부일처제도 절대적일 수 없고, 이성결혼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요,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네째는 나르시시즘입니다. ‘자기애’ 또는 ‘자아’ 에 도취된 상태를 말합니다. 19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 잠재력을 회복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자를 바깥에서 찾지 말라’ ‘내 자신이 내 구원자다’고 선전합니다. 이 주장을 교회로 끌고 들어와,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모든 그릇된 이론들을 주저하지 말고, 칼같이 거부하는 자가 아니면, 오늘의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중립적 태도도 허락될 수 없는 이 요소들을 코로나 물리치듯, 우리 교회에서 물리치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목숨을 바쳐 저희를 위해 대속과 구원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저희에게 주셨사오니, 저희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고 선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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