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의 기념일에> (새번역)
디모데후서 4장 6, 17절. “[6]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 [17] 주님께서 내 곁에 서셔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여 전도의 말씀이 완전히 전파되게 하시고, 모든 이방 사람이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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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베드로와 바울, 두 큰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날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큰 업적을 세운 인물들이므로, 우리가 이 두 분을 ‘큰 사도’ 라고 부르지마는,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를 ‘큰 사도’ 로 보고 있을지, 우리가 쉽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 1 )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부라고 해서 남보다 무식하다거나, 천대 받아도 될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복음성경을 통해서 보는 그의 인상은, 직설적이고, 혈기가 있었습니다. 의리를 중요시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다소 허풍이 있었던 인물로 보입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인간미도 느껴지지만, 위기를 만나면 의리는 커녕, 인간 노릇도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던 때에, 그가 중요시했던 의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의 인간미는 전혀 작동하지 못했습니다.
가령,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스승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점, 예수님께서 정작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그가 어디 있었는지 종적을 감춘 점, 부활의 아침에 빈 무덤을 확인하고서도, 그가 그후 옛 고향 가버나움의 어부생활로 돌아가 있었다는 점 등은, 그가 과연 ‘으뜸제자가 맞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 2 ) 바울은 본래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율법이 자기의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 신념에 차 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율법에 충실하지 못한 동족을 만나면, 더러운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집사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율법은 자기 의를 나타내는 데에는 효력을 발휘할는지 몰라도, 인간을 구원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언제 깨닫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복음에 기초한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후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갈 1:17)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면,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인 사도들과는 간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도 되지만, 한때는 그랬을 망정, 베드로와의 사이에는 신앙에 있어서나, 열정에 있어서나 아무런 차이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독교 신앙의 표제로 삼을 때 (고전 1장 18절 이하) 부터, 바울과 베드로는 몸은 둘이었으나, 한 몸의 지체로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개성들은 십자가 앞에서 소멸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이끄심에 철저히 복종했습니다. 두 분은 모두 주후 64년 경에 로마에서 각각 순교를 당함으로 사도의 직분을 다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성령의 이끄심 속에서 저희가 모두 하나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 만이 드러나며, 온 세상은 복음을 듣고 구원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