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에도 죄의 짐을 벗지 못하는 우둔함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 성삼후 5주일

{로마서 7장 15-19절}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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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무거운 짐’(마 11:28) 이라 함은 물리적으로 중량이 나가는 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의 짐’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주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함으로 죄의 짐을 벗어놓기 전까지는 죄의 짐을 항상 지고 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매일 내려놓아야지 하면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죄의 짐입니다(롬 7:15).

우리들의 죄의 짐을 벗겨주시고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의 짐을 친히 맡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사 9:4, 6)

저는 최근에 ‘아침 묵상’을 쓰면서, ‘죄의 회개’에 대해서 자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교회 문 앞에 ‘OO 교회’라고 간판을 써붙였습니다. 무엇이라고 썼든, 그것은 ‘죄문제 전문 치료센터’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치료한다 해서 찾아 왔는데, 죄의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고, 다만 최근 시사문제나, 건강법이나, 심리치료상담 안내에 해당하는 말이나 듣다가 헤어지는 모임이라면,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사람들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국가들에서는 그런 교회들이 건물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벌써 매물로 나와 있거나, 아니면 이미 무슬림이나, 사업가들의 손에 넘어가서, 무슬림의 달 모양의 심벌이 걸렸거나, 아니면 무슨 식당, 또는 비어홀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는, “나는 거룩한 위선자들이 모이는 교회를 바라지 않습니다. 정직한 죄인들이 모이는 교회를 원합니다”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김병국역, 도서출판 바울)라고 했습니다. 진정 회개가 중심주제가 되고, 거듭남과 구원이 목표가 되는 교회만이 오래도록 굳건히 서 있을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요단 강의 회개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때때로 성령부흥운동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저희의 회개와 성령 안의 삶으로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되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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