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씨앗이 결실할 소망을 가지고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13장 3-8절 (새번역)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여러 가지 일을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5]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6]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7] 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 가시 덤불이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8]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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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식당에 가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하듯이, 교회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전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설교자’ 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밭에 뿌린 ‘씨’ 라고 했는데, 말씀을 들어 회중의 삶 속에서 결실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완벽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고장이 날 수는 없습니다. 고장이 날 수 있는 곳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설교자’요, 또 하나는 말씀을 듣는 ‘회중’입니다. 오늘의 비유에서는 회중(밭)의 고장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 2 )) 직업이 설교자면, 불행합니다. 때로는, 사명감으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자신도 믿지 못하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갈급한 사람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설교자 자신이, 말씀의 진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설교자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도 회중에게도 불행할 것입니다.

이런 비극을 면하기 위해, 저는 이렇게 노력합니다. 1) 예전적 교회는 Lectionary (매 주일, 또는 매일의 성경본문) 가 작성되어 있습니다. 본문과 씨름하지 않고서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우선 본문을 30번 이상 읽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게 됩니다. 말씀은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읽으면 저 자신이 먼저 변화를 받습니다.

2) 설교시간 동안은 설교자에게 일방적인 ‘타격’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설교를 권투에 비유한다면, 회중을 KO시켜야 할 책임이 제게 있습니다. 공격을 당하기 위해, 회중이 귀한 시간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3) 말씀에 비추어, 저 자신의 간증을 전합니다.

4) 주제를 선명히 합니다. 5) 초점이 다른 예화를 동원하지 않습니다. 6) 성령의 인도하심에 저를 맡겨야, 성령께서 제 설교를 사용하십니다. 7) 제 생애의 마지막 설교라 생각하고 설교합니다. 듣는 사람에게도 그의 생애의 마지막 설교라고 전제하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목사인 제 아버지의 교훈입니다. 8) 설교는 영적 사건이므로, 역사가 일어납니다.

(( 3 ))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씨앗)이 회중(밭)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데에는, 회중의 책임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술을 마신 직후에 설교자 앞에 와 앉은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일단 성의를 다 표한 것입니다.

저는 트로트를 혐오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 트로트 가수 나애심 씨에게, 10분을 할애하여, 그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 노래를 경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노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겠습니까? 10분간 설교를 경청하는 회중이 맹숭맹숭하게 앉아 있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큰 감동으로 저희의 인격에 스며들어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이 사랑하는 교회가, 뜨거운 말씀의 도가니가 되게 하시고, 말씀으로 역사를 뒤바꾸는 교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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