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11장 20-24절 (새번역)
[20] 그 때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다. [21]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마을들에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쓰고서,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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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들은 ‘회개’를 자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를 했다고 자부할 사람이 많을까요? 우리들의 회개는 다만 ‘뉘우침’, ‘후회’, ‘돌이킴’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 1 )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을 미디안 대상들에게 팔아버린 형들이, 기근으로 애굽에 양곡을 사러 가게 됩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복잡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동복동생 베냐민을 보는 순간 감격에 복받쳐 자기가 요셉임을 실토합니다. 그후, 아버지 야곱을 애굽에 모시고 살다가, 아버지가 별세합니다. 이때 요셉의 형들이, 모여 수군댑니다. ‘이제는, 동생 요셉이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하며 공포에 떱니다. 이것은 여지껏 요셉의 형들이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창 50:15이하).
( 2 ) 다윗은 일생일대의 범죄를 저지릅니다. 전쟁에 나가 싸우고 있는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기의 아기를 임신하자, 우리야 장군을 죽을 곳으로 보냅니다. 뜻을 이룬 다윗왕은,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절망적인 인식에 깊은 괴로움에 빠집니다(시 51장).
다윗왕은 밧세바와 그가 낳은 왕자들을 볼 때마다, 물론 다윗 마음에 회개의 생각이 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회개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확신이 언제쯤 있었을까요?
( 3 ) 사도 바울 역시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는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지만, 간접적인 역할은 했을 듯이 보입니다. 첫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서는 바울에게 결정적인 책임이 있었습니다(행 7:54-8:1). 그리고 그후 산헤드린이 부여한 특권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을 투옥하고, 사형에 처하게 했습니다(행 26:10).
바울은 그의 회개에서,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불순종의 영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엡 2:3). 이렇게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합니다.
누군들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결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아니고서는 소망이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십자가 만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요, 완성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들, 모든 상황들이 회개의 기회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의 모든 날들, 저희가 만나는 모든 상황들이 회개의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진정한 회개로, 저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