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사무엘상 20장 4, 20-23절 (새번역)
[4] 요나단이 다윗에게 제안하였다. “… 자네를 돕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겠네.” … [20] “그러면 내가, 연습삼아 어떤 표적을 놓고 활을 쏘는 것처럼, 그 바위 곁으로 화살을 세 번 쏘겠네. [21] 그런 다음에, 내가 데리고 있는 종을 보내어, 그 화살을 찾아오라고 말하겠네. 그 때에 내가 그 종에게 큰소리로 ‘너무 멀리 갔다. 이쪽으로 오면서 다 주워 오너라’ 하고 말하면,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겠네. 자네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나오게. [22] 그러나 내가 그 종에게 ‘아직 더 가야 된다. 화살은 더 먼 곳에 있다’ 하고 말하면, 주님께서 자네를 멀리 보내시는 것이니, 떠나가게. [23] 오직 우리가 함께 약속한 말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길이길이 자네와 나 사이에 증인이 되실 걸세.”
* * * *
다윗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친구가 요나단이었고, 요나단에게도 둘도 없는 친구가 다윗이었습니다. 이런 친구 사이라면 진정 부러운 우정입니다. ‘요나단’ 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실하고, 착했습니다.
그가 사울왕의 아들로, 왕세자임이 분명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 다윗이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차기왕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우정에 손상을 입지 않고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친구관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친구관계가 다 믿을 것은 아니라고 경계하시는 말씀도 여러 곳에 나옵니다.
신명기 (13:6이하) 법전은 경고하기를, “당신들이 목숨처럼 아끼는 친구 가운데 누구든지, 당신들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 ‘우리가 … 사방 원근각처에 있는 민족들의 신을 섬기자’ 하더라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말고, … 불쌍하게 여기지도 말며, 가엾게 여기지도 말고, …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고 엄명하고 있습니다.
욥이 난치병을 앓고 있을 때, 그의 친구가 찾아와 이런 저런 치례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신실했던 욥의 심경을 건드리는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말합니다. “네가 언제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며, 어느 때까지 말로써 나를 산산조각 내려느냐?”(욥 19:2)고 격분합니다.
가룟 유다가 스승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한밤 중에 어두운 겟세마네 동산에서 스승의 입에 ‘배반의 키스’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 (마 26:50)
‘막역한(배반할 수 없는) 관계’ 라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 하지만, 진정 ‘막역한 관계’ 란, 우리 인간사회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친구를 많이 둔 사람은 친구 때문에 해를 입는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친구도 있습니다(잠언 18:24).
유익을 목표로 친구로 얻고자 한다면, 아마도 영원토록 친구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룩한 사명 속에 한 덩어리가 된 ‘형제(자매)애’ 속에 살고 있다면, 그들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친우관계로 발전할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에게 천상의 친우애를 이 땅에 살면서도 경험하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희가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사명 속에 사는 동안, 복된 친구들을 만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