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가복음 4장 36-41절 (새번역)
[36] …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37]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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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적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매일 저녁이면 등잔에 석유가 가득차 있는지, 등피가 잘 닦였는지를 점검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비문명권에서 문명권까지 살아온 저의 회고입니다.
가령,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시골벽지에 가서 일박 이일 지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곳에는 잘 가지도 않을 테지만, 갔다고 하면, 서둘러 돌아오든가 아니면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곳으로 이동하고 말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 계셔서, 만유를 주관하시던 신적 존재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세상에 들어와 사셨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이셨을 것입니다. 의-식-주 뿐이었겠습니까? 언어, 문화, 인간습관, 시공의 제약, 교통, 질병, 시각-청각-후각의 한계, 모든 것이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불편하실 때마다, 하늘의 권능을 행사하신다든가, 또는 불평을 말씀하셨다면, 아마도 곁에 있던 제자들이 때로는 송구스러웠을 것이고, 때로는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 놓지 않으셨어요?’ 라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하늘의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당하고 있는 제약을 그대로 당하시며 사셨던 것입니다. 아무런 불평 없이 지내셨고, 거의 빈틈이 없으셨습니다. 대단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파도 치는 날, 배를 타면 풍랑에 얼마나 배가 요동을 쳤겠습니까? 그런데도, 고물에서 베개(아마도, 배의 난간인 듯)를 베고 주무셨다고 합니다. 파도가 몹시 철석거렸을 테니, 잠에서 깨셨을 듯도 합니다. 그러나 쉬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보다 못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으세요?”(38절)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파도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갈릴리 바다의 소란은 그치고,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혼자서 배를 타고 계셨으면,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아무리 오래 지속되어도, 그냥 쉬고 계셨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이 힘들어하니까, 천상의 능력을 잠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다만 불쌍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치유의 능력, 축마의 능력, 천상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하늘의 권능을 감추시느라 늘 조심스러우셨습니다.
<기도> 주 예수님, 괘씸한 반역의 무리들을 생각하면, 당장 열 두 군단도 넘는 천군을 동원하실 수 있으셨지만, 오래 참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비오니, 저희도 주님의 겸손과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