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말년을 어떻게 보낼까?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장 17 … 37 절 (새번역)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 [22]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4]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5] … 그런데 이제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 [37] 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 * * *

바울이 밀레도에 갔을 때, 그의 나이가 아직 60세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워낙 복음전파의 일로 처처에서 수도 없이 매를 맞았고, 끼니를 굶으며 몸을 혹사했고, 남달리 고생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무얼까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해답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양이 사자굴을 찾아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고의 권력자 로마총독과 총독이 임명한 대제사장들이 한 패가 되어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었으므로,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수하에 있다가, 돌연히 기독교인 가운데 가장 열심있는 사도가 된 사울(현재의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나는 것은, 수배자의 자진출두나 마찬가지였고, 손쉽게 문제의 인물 하나를 제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무슨 영웅주의적 행동이 아니었고, 자신이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할 대상이 누굴까를 생각할 때면 늘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예루살렘의 박해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때 처럼,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의 심령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줄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장로들 앞에서 말한 바 대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죽음의 길을 의미했습니다.

에베소를 지날 때에, 그 지방에 수많은 정든 교회들과 그 교회들을 돌보는 교회지도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들의 호칭이 ‘장로’(프레스뷔테로스)라고도 했다가, ‘감독’(에피스코포스, 행 20:28, ‘주교’)이라고도 했습니다. ‘에피스코포스’는 ‘순회부흥사’ 또는 ‘순회목회지도자’ 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진정 애절합니다. 교회의 양무리들을 잘 양육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을 잘 돌보라고 했습니다. 감독(주교)의 개인생활이 순결할 것과 신실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 전제 위에서 양 떼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얼마나 속을 썩인 일이 많았으면 이렇게 자상하게 부탁을 하는 것일까요?

다시는 바울 사도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는 장로들은 “바울의 목을 안고 실컷 울었다” 고 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이라며, 바울을 배타는 곳까지 배웅하면서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이 코이노니아 속에, 복음의 사명 안에 그들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 인생의 말년도, 바울 사도처럼 복음 전도의 사명 속에서 맞이하게 해 주옵소서. 저희가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의 씨를 뿌리고 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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