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시편 85편 5-9절 (새번역)
[5]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로 노여움을 품고 계시렵니까? [6] 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도록 우리를 되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7] 주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8]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듣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성도들이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9] 참으로 주님의 구원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있으니, 주님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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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절대평화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폭력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를 죽이겠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는평화론입니다. 성경에서 이 견해를 지지하는 말씀을 찾기도 합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 5:39) 하지 않았느냐 합니다.
이 절대평화론자들은 ‘집총 거부’의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즉, 나라의 법에 의해서, 군대에 강제징집을 당한다 하더라도, 총을 손에 들고, 방아쇠틀에 손가락을 넣지 않겠다는 주장을 합니다. 사람을 향하여 어떻게 총을 쏠 수가 있느냐는 정신에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 주장 때문에 어떤 불이익이 와도,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촌치의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미국 등 세계 몇 나라들에서 어떤 교단들은 이 평화론에 입각해서 ‘집총거부’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불법으로 몰지 않기 위해서 총을 휴대하지 않는 병과(정훈, 병참, 군의, 인사, 등)로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 2 ) 20세기 대 신학자 칼 바르트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들이 나치에 항거하기 위해서, 2차대전에 종군했습니다. 왜 성경의 말씀(‘오른 뺨 왼 뺨’)을 따르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그것은 개인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주신 권고지, 무고한 자기 나라 백성들을 해치며 쳐들어오는 침략군에게 나라를 그저 내어주라는 뜻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사들의 역할이나, 유대 왕조들의 역할이, 군사력을 배양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도우심 만으로 나라와 성전을 지키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의로운 군사, 거룩한 군사들을 양성하기를 하나님께서도 권장하셨습니다.
( 3 ) 인류사에 ‘대의 명분’이 있어, 전쟁을 벌인 예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된 전쟁이 오히려 더 많습니다. 가령, 후추 수입을 방해한다고 일으킨 ‘후추전쟁’, 아편 수입을 강요하면서 벌인 ‘아편전쟁’, 세계 곳곳에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을 빼앗으려고 벌인 ‘원주민 말살 전쟁’(호주, 아메리카 등)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름을 걸고, 무슬림들을 멸절하려 했던 ‘십자군전쟁’이 역사에 엄연히 있지 않았습니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습니까? 소위 기독교국가라는 나라들이 침략전쟁, 화풀이전쟁을 벌여,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구호나 형식적 기도문구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망녕된 일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이타적 삶’의 방식이, 우리들의 믿음이 될 때에라야, 우리는 평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침략자의 전쟁에 목숨을 걸고 나아가 싸우고,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