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은혜의 자리여, 영원하라!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시편 137편 1-6절 (신복룡의 성경)

[1] 바빌론 강기슭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지우도다. [2]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고. [3]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무리가 노래를 부르라 하고,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누나. “자, 시온의 노래를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4] 우리 주님의 노래를,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5]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그대를 잊는다면, 내 오른 손이 힘을 잃으리라. [6] 내가 만일 그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 * * *

( 1 ) 유투브 자료 가운데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노예들의 합창’이 실려 있어서, 들었습니다. 이 합창의 가사는 시편 137편의 내용과 맥을 같이하는 바빌론 포로들의 노래였지만, 싯귀(노랫말)는 오페라를 위해 새로 작성한 것이어서, 이 시편과는 조금 다른 가사였습니다. 하지만 연주가 너무 좋아서 넋을 잃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청중은 열광하며 박수를 보내는데도, 연주자들은 그들이 앉은 자리, 선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청중의 박수소리가 가라앉으며, 합창단은 다시 ‘노예들의 합창’ 전곡을 연주했습니다.

그 합창곡에 맞는 연주였다고 생각됐습니다. 어찌 ‘노예들의 탄식소리’에다 박수를 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시편을 노래하면서, 6절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라고 노래한 후에, 박수를 칠 수 있겠습니까? 시를 읊은 사람은 목이 메어 울고 있는데..?

( 2 ) 지금도 신실한 유대교도들이라면, 이 시편을 외우면서, 마음으로 울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껏 예루살렘 성전이 섰던 자리에는 모슬렘 모스크(회교 사원)가 금빛 돔을 번쩍이며 서 있는데, 지금이 바빌론 포로기가 끝나고도 2천 5백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포로귀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여길 것 아닙니까?

제 아버지는 북한 땅에 살면서, 일제의 탄압 아래서, 또 공산당 핍박 아래서 여러 제단을 섬겼습니다. 웅상, 어대진, 회령, 이천, 평양 서문밖, 이 모든 교회들을 그리워하면서, 찬송가 247장 4절을 즐겨 불렀습니다: “내 손의 재주 무디고, 내 입의 말이 굳으며, 내 몸의 피가 식어도, 나 잊지 못할 시은소.”(1949년판)

기독교계 재단의 학교인 신일고등학교-서울사이버대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 설립자 고 이봉수 장로를 기념하는 기념비도 있었습니다. 안내하던 분이 그의 유언을 들려 주었습니다: ”통일이 되거든, 내 은혜의 자리, 평양에다 교회를 세워 다오.”

( 3 ) 여러분의 은혜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은혜를 받은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자리’도 중요하겠지만, 은혜를 내리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은혜의 자리가 소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그곳에서 우리들의 은혜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은혜의 자리, 갈릴리 바닷가의 어느 바윗돌 식탁에서부터 떠나, 30년 후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 앞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던 날까지, 또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은혜의 자리에서부터 떠나, 30년 후 로마 트라폰태에서 목이 잘리워 죽던 날까지, 그들의 발이 이르는 곳들이 모두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의 발이 이르는 곳마다, 주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서, 그 모든 자리들이, 모든 순간들이 은혜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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