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례 요한의 신앙으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세례 요한의 참수 추도일’ 에

마태복음 14장 6-12절 [6] …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서, 헤롯을 즐겁게 해주었다. [7] 그리하여 헤롯은 그 소녀에게,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맹세로써 약속하였다. [8]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로 가져다 주십시오.” [9] 왕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를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고 있는 앞이므로, 그렇게 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10] 그래서 그는 사람을 보내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께 가서 알려드렸다.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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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기념일은 그의 생일인 6월 24일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보다 생일이 6개월 앞선다는 점,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이 일으킨 회개운동이 6월을 전후해서 전국으로 파급되어,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자연스런 연결이 이루졌다는 점에서, 요한의 기념일을 6월 24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왕 헤롯의 생일에 세례 요한이 참수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이때를 기점으로 예수님께서 요한의 회개운동의 주제, 곧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선포를 시작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또 하나의 요한의 기념일을 교회가 지키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신앙운동은 2천 년 전의 일이고, 더구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공생애의 찬란한 ‘햇빛’으로 그만 세례 요한의 ‘달빛’은 빛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현대교회는, 목전에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인류의 위기’ 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 ‘다시 세례 요한의 신앙’ 을 회복해야 할 것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례 요한은 회개를 하나님 신앙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인본주의와 현실주의, 개인주의와 편의주의 사조에 따라서, ‘요한의 회개운동’이 필요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 걸음이 회개입니다. 죄의 문제를 심리상담으로 풀 수는 없습니다. 죄와 세속과 마귀를 정면으로 대적해야 기독교입니다.

둘째로, 세례 요한의 신앙전통은 경건한 삶이었습니다. 당시에 광야에 흩어져 무리지어 살던 나시르인으로 살았습니다. 평생 경건 훈련으로 단련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라는 바울의 탄식(딤후 3:5)은 ‘경건 무용론’이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도 갖추고, 경건의 스피릿도 회복하라는 애절한 호소입니다.

세째로, 세례 요한은 무소유의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모든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을 버렸습니다. 그가 지닌 것은 몸을 가릴 낙타털 한 자락 밖에 없었습니다. 진리 안에 사는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너무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상관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바쁘고, 바쁘지만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단신으로, 그의 별호가 ‘광야에 외치는 소리’(마 3:3)였습니다. 그는 헤롯도 두렵지 않았고, 그가 두려워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네째로,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사명자로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주십니다. “당신이 진정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가 맞으시지요?” 구차한 질문이지만, 우리를 위해 여쭤 주신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온 생애를 바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으로 살았던 세례 요한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저희의 삶에서 그의 회개와 경건과 검소와 증거의 삶을 본받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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