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져야 할 ‘남은 고난’이 뭘까요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공동번역)

1. << 내가 져야 할 ‘남은 고난’이 있습니까? >> 골로사이 1장 24-25절 : [24]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나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의 고난이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의 고난으로 메우지 않으면 안 될 무슨 남은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모든 인류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그러나 각 시대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수고를 바쳐야 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수고를 통해서 골로사이를 비롯한 많은 지방의 무리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셀러 같은 선교사들의 수고를 통해서 복음이 한국 땅에 들어왔고, 우리 한국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먼저 복음을 들은 우리들의 수고를 통해서,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 땅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기까지는 누군가가 수고를 해 줘야 하는 ‘남은 수고’ 가 있는 것입니다.

2. << ‘하나님은 나의 바위’는 ‘바위 신’을 말하는 것인가? >> 시편 62편 6-7절 : [6] 그분 홀로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7] 내 구원 내 영광은 하느님께 있으니, 그분은 나의 힘이신 바위, 나 하느님께 피신하리라.

준 사막지대인 팔레스틴 땅에는 곳곳에 바위산이 솟아 있습니다. 우악스러운 바위산이 아니고, 전쟁에서 그 바위산에 먼저 오른 군사들이 승산이 있었습니다. 그런 바위산을 ‘쭈르’(tsur)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시편 여러 곳에 “하느님은 나의 ‘쭈르’”라는 싯귀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형용하는 metaphor로서 , “하느님께로 피하는 사람에게 확실한 구원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3. << 안식일(주일)에 ‘착한 일’을 해도 되는가? >> 루가복음 6장 9-10절 : [9]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다.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10] 이렇게 물으시며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이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지요. 안식일이든 평일이든, 착한 일을 할 수 있으면,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물으신 것은, 상대방의 이성적 판단력과 양심의 유무를 물으신 것이었죠.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이어서 안 된다고 가탈을 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을 잘 섬기는 자세라고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 하느님을 믿고 있단 말입니까?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아연실색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이론이 밝아도,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인간의 이성으로도 맞지 않고, 양심으로서도 용납되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자들은 사이비(신흥)종단의 교주들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 주 하느님,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진리의 빛 안에 살면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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