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르코복음 16장 1-2, 4-7절 (공동번역)
[1]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해가뜨자 … [4] 가서 보니 그렇게도 커다란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5]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 갔더니 웬 젊은이가 흰 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보고 질겁을 하자 [6]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 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7]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레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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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버지는 53세 되던 해에 풍을 맞았고, 3년 후에 별세했습니다. 그 3년 간, 먼저는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 후에는 발걸음이 불편해지더니, 점차 온 몸이 불편해지고, 결국 말씀을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진 채, 고생하다가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주로 말년에 힘들어하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후일에 예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를 기억하게 되는 것을 별로 바라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은, 주로 권세가들과 충돌하시고,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른 일이라든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당하고, 골고다로 직행,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이 모두였습니다.
죽으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신 엄청난 일도 있었지만, 그토록 살벌한 분위기의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을 기억하기보다는, ‘갈릴리의 예수’로 기억되기를 바라신 것 같습니다.
갈릴레아에서의 예수님의 생애는, 30년간의 조용한 ‘인간 예수’, 그리고 3년간의 ‘놀라운 랍비 예수’의 생애였습니다. ‘팔복 선언’으로 시작되는 산상의 설교라든지, 갈릴리 해변의 동네들을 다니시며 이곳 저곳에서 여러 부류의 주민들을 만나시며, 하늘나라의 복된 소식을 전하시고 지내시던 날들의 기억이야말로 갈릴리 사람들은 물론, 모든 시대의 세계민들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셨던 빛나는 역사였습니다.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서 선교사 고 대천덕 신부 내외를 만나본 이들의 추억담을 모아 놓은 책자가 있습니다. 주로는 예수원의 회원으로 고인 내외와 더불어 원내에서 생활했던 분들, 또 그분을 남달리 추모하는 이들의 남모르는 일화들이 한데 엮어진 그 책자야 말로, 고인을 다시 만난 듯 고인의 생생한 추억을 담았습니다.
두 번 반복할 수 없는,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어록을 집대성한 복음서들이야 말로, 만민을 깨우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신약성서개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제가 만약 복음서 기자라면, ‘부활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떤 기록보다 부활편에 치중해야 하는데, 왜 그의 생애와 교훈에만 그토록 많은 분량을 할애했는가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활의 증언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어라’ 라고 믿음이 전파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고, ‘예수님의 생애를 보고 예수님을 믿어라’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레아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저에게는 갈릴리에서 보이신 ‘인간 메시아’로서의 모습을 길이 기억하게 하고자 하셨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기도> 주 하느님, 영원을 살아야 할 인간에게, 이 땅 위에서 유한한 생명을 살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서 영원을 살 사람답게,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