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디모데전서 3장 1-7절 (새번역)
[1] 어떤 사람이 감독(‘주교’)의 직분을 맡고 싶어하면, 그는 훌륭한 일을 바란다고 하겠습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며, 언제나 위엄을 가지고 자녀들을 순종하게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5]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또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그리하면 그가 교만해져서, 마귀가 받을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감독은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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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어도르(Theodore of Tarsus, 602 – 690)는 실리시아(투르키예의 동남부 해안지방)의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원래 희랍인으로 청년기에 아테네에 가서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후 다시 다소로 돌아와, 66세가 되기까지 무명의 수도자로 살았습니다.
그 당시, 영국의 대주교 자리가 궐석이 되었습니다. 영국교회는 대주교 후보로 위가드(Wigheard)사제를 천거했습니다. 그리하여 위가드가 로마로 가서 영국의 대주교로 승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그만 크게 유포되고 있던 역병에 감염되어 위가드와 그와 함께 동행했던 몇 사람이 모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로마 주교’(교황) 비탈리안은 자문역들과 상의하여 영국교회를 위하여, 당시에 로마에 와 있던 실리시아의 테어도르를 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희랍어와 라틴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신중하고, 경험이 풍부한 수도자였습니다. 교황은 그를 도울 사람으로, 아프리카 출신이며, 나폴리의 수도원장이었던 아드리안을 보조자로 임명했습니다.
이 획기적인 인사조치는 영국교회로서는 대단한 반발을 일으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조치였지만, 오히려 이 결정으로 말미암아, 영국교회는 영구한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테어도르는 대주교에 착좌하기 전에, 영국의 대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영국교회가 안고 있는 지방 간의 갈등과 인종 간의 갈등 문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672년에 영국교회 제1차 전국의회를 개최하여, 당시의 탁월한 교회 지도자 윌프리드와 챠드를 내세워 캔터베리관구 이외에 요크관구를 별도로 신설함으로써, 뿌리깊은 교회 내분의 역사를 끝내게 만들었습니다.
교회행정의 역량을 나타낸 테오도르 대주교는, 신도훈련에 있어서도 잘 구성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여, 로마로부터 동행했던 아드리안 수사에게 신도교육을 주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도양성과 성직후보자의 신학교육에 내실을 기할 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캔터베리에 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아드리안과 테오도르 대주교는 성경학습 이외에도 시문학, 천문기상학, 산술, 그리고 라틴어와 희랍어를 영국인들에게 널리 가르쳤습니다. 신학생들이 심정적으로 그들에게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온 영국교회가 테오도르 대주교에게 절대복종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것이 오랜동안 영국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교회 위에 군림하지 않았고,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21년 재직기간 동안 모든 성직자들과 신도들을 일으켜 주며, 그들의 애환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청지기로 살았습니다. 비문명권의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알려져 있던 영국의 신도들에게 진정 교육자로서 섬겼던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겸손한 지도자상을 보인 테오도르를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를 본받아 저희도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써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인격을 세우는 신앙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