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하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다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루가의 복음서 9장 51-56절 (공동번역 개정판)

[51]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은 길을 떠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하였으나 [53]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54] 이것을 본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고 물었으나, [55]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고 나서 [56] 일행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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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애송이 사제 시절에 감히 주교님들을 공공연히 비난했습니다. 심판관이나 된 듯 고하를 막론하고 비난했습니다. 정말 철부지였습니다. 백배 사죄를 빕니다.

남을 탓하는 버릇은 지금도 제 속에 남아서 저를 한없이 죄짓게 합니다. 교회 곳곳에서 수고하시는 이들을 지금도 탓하고, 일간신문을 볼 때도 곧잘 제 입에서 여러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심지어 신문에 몇 줄 글 읽은 것 가지고, 욕을 하면서 정죄합니다. 이 버릇 고치겠다고 오늘 다시 다짐합니다.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마가복음 3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의 별명을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들’)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천둥만큼이나 시끄럽게 떠들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 형제들이 소란떱니다. “이 사마리아 놈들을!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싹 태워 죽일까요?” 이렇게 떠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가령 예루살렘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하러 가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의 일은, 우리(사마리아 사람들)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외면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사마리아 사람들도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대접은 커녕 박대를 받으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구박을 받으시면서도 왜 예루살렘에 가신다고 하는지, 참으로 못 말릴 일이라면서, 메시아로서의 대속의 사역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외면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두고 역정을 내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그 형제들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바로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사람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내용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마는, 야고보와 요한이 꾸중들었던 것은 마땅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냉대를 받고, 예루살렘에서는 죽임을 당하는 우리 주님의 모습은 저희가 보기에도 분노가 치미는 일이었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분격하실 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참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숨이 멈추실 때까지 겪어내셔야 했던 온갖 아픔과 매정스런 거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독과 배신과 조롱과 수치, 지금 금방이라도 초월적인 능력으로 압제자들을 벌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내려 우뚝 서시고 싶은 욕구를 짓누르며, “다 이루었다” 하시던 그 순간까지…

예수님은 얼마나 인내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또 얼마나 인내하셨겠습니까? 그 인내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견디기 힘들게 하는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주는 자들 앞에 분노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그 고통을 겪으면서, 하느님께서 당하신 고통을 깨닫게 되면 얼마나 복됩니까?

<기도> 주 하느님, 저희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저희의 구원을 위하여 겪으신 인내의 크기를 만분지 일이라도 저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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