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루가의 복음서 10장 3, 5-6, 8-11절 (공동번역 개정판)
[3]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라고 인사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 [8]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주는 음식을 먹고 [9] 그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 [10] 그러나 어떤 동네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길거리에 나가서 [11] ‘당신네 동네에서 묻은 발의 먼지를 당신들 한테 털어놓고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만은 알아두시오.’ 하고 일러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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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어, 그들이 각처에서 한 일은 대략 세 가지 일이었던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1)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9절). 2) 평화를 빌어 주었습니다(5-6절). 3)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전했습니다(9, 11절). 우리들도 제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됩니다.
( 2 ) 첫째로 병을 고쳐 주었다는 내용을 봅시다. 이것은 의사의 일이고, 예수님께서도 많이 행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병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이 험한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다 큰 종합병원을 세우셨거나, 제자들에게 복음보다 의학을 공부하게 하셨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가르치시기보다, 온 세상을 향하여 외치시기를 ‘세상 모든 병들아, 물러가서 다시는 인류에게 다가오지 말지어다’ 라고 질병퇴치 명령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많은 병자들을 만나신 일은, 예수님의 긍휼지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급적이면 질병을 고치시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시려고 애쓰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집중하신 일은, 오히려, 기도와,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시는 일과, 제자들을 양육하시는 일에 있었습니다.
( 3 ) 둘째로, 평화를 빌어 주는 일은, 유대인들의 인사법이었습니다. “살롬 레카”(‘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뜻)가 그들의 평소 인사였습니다. 우리들이 ‘안녕’이라고 인사하는 것 만큼이나, 자주 하는 말입니다. 평화를 빌어 주는 일을 제자들의 사명으로 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사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 평화’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부터 6장 2절까지, 평화의 진정한 뜻을 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고후 5:18),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하심을 받는 것이 진정한 평화의 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누구나 ‘무죄선언’을 받아야 참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고후 5:21).
이 가르침(고후 5:18 이하)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었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이룩하신 ‘십자가의 대속’이었고, 대속의 죽음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원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화해’와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말이 아닙니다. 하나의 소식입니다. ‘얼른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첫 사람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본성이었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이 죽어야 마땅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러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기도>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주셨사오니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가 하느님과 화해하여, 참 평화 안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