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루가복음서 11장 9-13절. (공동번역 개정판)
[9]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12]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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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계교회가 함께 기념하는 우리들의 선대 신앙인들이 몇 분 계십니다. 그 분들의 생애의 면모들을 몇 가지 간단히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 모이비, Moibhi, ? – 545 }. 수도원장 모이비의 이름은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글라스네빈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곳에 그가 수도원을 설립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스코틀랜드 선교의 업적을 이룬 콜룸바 수사장이 거기서 모이비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이비는 주후 545년 오늘 별세했습니다.
{ 리폰의 윌프리드, Wilfrid of Ripon, 633 ? – 709 }. 주교 윌프리드는 노덤브리아 출신으로, 린디스판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후 리용과 로마로 유학을 했습니다. 당시에 영국 내에 교회가 두 가지 파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로마관구와 상관없이 영국인들이 일으킨 교회였고, 또 하나는 로마관구가 관할하는 교회들이었습니다.
이 두 계열 간의 갈등이 때로는 정치적인 파벌 싸움으로까지 번졌습니다. 그래서 요크관구의 설립을 위해 로마를 다녀 온 후, 에그프리드 왕에게 밉보여 체포 당했습니다. 하지만, 탈출하여 남부에 분포된 색슨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민족 간 갈등의 와중에서도 영국을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고, 독일선교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 엘리자벳 후라이, Elizabeth Fry, 1780 – 1845 }. 교도소선교로 일생을 산 엘리자벳 후라이는 영국 노포크 지방 어럼 출생으로, 스무살에 죠셉 후라이와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런던에서 상업을 하던 신실한 퀘이커 신자였습니다. 엘리자벳은 교회에서 친우회를 담당하는 지도자로, 교회는 그에게 설교권을 허락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당대의 여자교도소의 인권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20년에는 런던 거리의 노숙자들을 위해 야간쉼터를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교도소선교 경험을 가지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교도소 상황을 개선하는 일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여인이었으며, 선교의 열정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의 기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 에딧 카벨, Edith Cavell, 1865 – 1915 }. 간호사 에딧 카벨은 쒀즈톤의 한 성직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교사를 하다가, 간호학을 공부한 후, 1907년까지 벨기에의 적십자사에 소속한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딧은 우군-적군을 망라한 상이군인들을 돌보는 간호사로서 흉탄이 그치지 않는 전장에서 일했습니다. 군 당국이 그에게 본국 귀환을 명령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영국 군인들을 벨기에로부터 홀란드로 탈출하는 일을 도와 주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체포되었고,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에딧과 함께 일하던 간호사의 변호를 하던 그는, ‘위증’을 한다면서 유죄판결을 받아 1915년 오늘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아무 변명 없이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형집행자를 향하여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을 했다는 신념으로 형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기도> 주 하느님, 훌륭한 믿음의 선대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참다운 믿음의 삶을 살다간 그들을 본 받게 하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저희의 삶도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