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공동번역개정판)
마태오복음서 21장 6-11절 [6] 제자들은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얹어놓았다. 예수께서 거기에 올라앉으시자 [8]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놓기도 하였다. [9] 그리고 앞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시민이 들떠서 “이 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11] 사람들은 “이분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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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년 간의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시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이번 예루살렘 여행에서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자, 이 일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면 나귀를 찾게 될 것이고, 나귀의 임자에게는 이렇게 말하면, 나귀를 쓰도록 허락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시키시는 대로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에 올라타셨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셨는지 설명하기를, “이는 예언자를 시켜 ‘시온의 딸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마 21:4-5)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9절을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 앞뒤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라고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메시아의 다른 별칭(다윗의 자손)을 사용한 것이나,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만세를 부른 것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은 또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분이 누구냐?’ 할 때에,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분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요.’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구세주)로 인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시민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무리와, 그렇게 믿지 않은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리들 가운데서만 있는 현상이 아니고,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두 가지 인식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기를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인식의 분열현상이 어느 인간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나’ 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싶지만, 때때로 ‘육체의 나’ 는 마음 속으로 계산하기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이런 저런 손해가 있을 것이라, 고통과 불행이 따를 것이라는 타산을 하면서, 결국 내 마음이 고백하고 싶었던 믿음의 불씨를 꺼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믿음을 잃는 것입니다.
초림의 예수를 인정하지 않던 무리들은 모두 이 계산의 분열에서 ‘마음의 나’ 가 아니라 ‘육체의 나’ 의 손을 들어줬던 사람들입니다.
재림의 주님을 두고도, 우리 인간들은 ‘마음의 나’ 와 ‘육체의 나’ 로 갈등을 일으킵니다. 내 마음이 지향하려 하는 구원의 길과, 육체의 내가 생각하는 자기타산법에 의한 멸망의 길, 이 두 갈래 길에서 우리 인간은 번번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의 선택을 확실하고 선명하게 가립시다. 기어코 ‘마음의 나’가 이기도록..
<기도> 주 하느님, 날마다의 ‘마음의 나’와 ‘육체의 나’의 갈등에서, 성령께 순종함으로 ‘마음의 나’가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기다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