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공동번역개정판)
{ 복음 } 마태복음서 7장 21, 24-27절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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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대표작 중 소설 ‘부활’은, 타락했던 한 귀족이 그의 일생을 통하여 성경 말씀과 그의 ‘교양적’ 양심의 인도를 따라 살면서, 그의 죽었던 영혼이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귀족 네플류도프는 평소처럼 배심원 중 한 사람으로, 살인과 절도 혐의자 한 여성의 재판정에 앉았다가, 피고인 여성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신의 청년 때에 자기의 욕정의 대상이었던 카튜사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여인은 귀족 청년 네플류도프의 고모네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동안에, 자기가 겁탈을 하여 아기를 임신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불우한 삶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카튜사의 이 모든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은, 네플류도프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 때문이었던 것을 깨닫고, 그는 카튜사의 무죄를 탄원함으로 그녀를 구조해 보려고 온갖 애를 쓰지만, 도저히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녀가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할 때에, 네플류도프도 자진해서 자기도 유배지로 따라가서 살기를 청원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귀족들의 삶이 얼마나 사회를 혼탁한 세상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며,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멋대로 취사선택하여 가르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토지의 사유화는 사회악 가운데 대표적인 악인 것을 네플류도프가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땅은 아주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23) 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교회 스스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람들에게도 말씀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고발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일로 말미암아서 그가 속한 정교회로부터 책벌을 받습니다.
톨스토이는 작중인물 네플류도프를 통해서, 인간이 진실을 깨달으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씀의 실행을 힘쓰는 가운데, 마침내 인격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이끌려고 이 작품을 썼던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갈 2:15-3:14 참고) 는 교리를 교회가 강조하므로, 아예 실행하기를 포기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인간의 행위라는 것 자체가 자신을 구원할 만한 것은 못됩니다. 하지만, 아예 실행을 포기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만한 ‘믿음’이 자리잡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엄숙히 다시 선언합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하느님)의 뜻대로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고 단언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과 서로 상충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은 ‘믿는 바를 실행하면서 살려고 애쓰는 사람’ 일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2:13 참고)
<기도> 주 하느님, 저희에게 말씀을 듣는대로 실행하려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실행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참된 믿음임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