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개역개정판)

{ 복음 } 마가복음서 6장 1-6상반절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인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상]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 * * *

60여 년 전, 저는 최전방 부대에서 소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지역이므로 부하 사병들의 신상파악을 잘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매일같이 지휘계통으로 지시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월북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저는 소위 ‘모범장교’는 못됐어도, 매일 사병들의 개인 신상파악을 하느라 애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참소대장이었던 해 봄에, 제대를 앞둔 분대장 하나가 할 말이 있다며 제 숙소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자리를 내주며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제대를 앞두고 포부가 크겠다’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단히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 허리에 찬 탄띠에서 소총 실탄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말이 “제가 이 총알로 수 백 번을 자살하고 싶었습니다. 제대하고 고향에 가 봐야, 옛날처럼 다시 원양선 타고 먼 바다에 가서 목숨 걸고 낚시질 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느니 이 총알 하나로 죽고 싶었습니다. 정말 이 유혹을 이기느라 힘들었습니다. 소대장님!” 하고 엎드려 울었습니다.

저는 아연실색을 했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분대장으로 판단했던 그가, 마음 속에 그런 고민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제가 꿈에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안다는 것이 뭡니까? 고작해야 이름자와, 고향과, 기껏 더 아는 것이 학력, 직업을 안다며, 사람의 신상을 ‘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저 같은 인간이 고작 이웃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2천 년 전, 나사렛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를 우리가 알지 않느냐? 그의 어머니가 마리아요, 그의 아버지는 목수일 하던 요셉, 그의 형제들은 모두 우리와 친하지 않느냐?” 이게 예수님을 안다던 나사렛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굽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요, 지금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셔서 온갖 인간고를 겪고 계신, 신격을 감추고 계신 분이신 줄은 몰라뵙고,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낯이 익은 이웃들 끼리는 ‘서로 아는 사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의 언어마저 ‘낯 익은 이웃이면 다다’ 하고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들의 영안이 열려 있는지, 그래서 영원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지, 영원한 나라의 임금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알며, 그의 이름으로 구원에 속한 사람이 되었는지, 정도는 알면서 사람을 안다고 해야 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다시 봅시다. 나와 더불어 구원과 영생에 참예할 사람인지를 살피며 사십시다.

<기도> 사랑의 주 예수님, 저희들의 눈을 밝히시고, 저희들의 귀를 밝히사, 진정 저희의 이웃을 아는 사람들로 살게 하옵소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게 하고, 영원한 나라의 약속에 더불어 동참하는 자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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