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적 언사는 누군가를 구한다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이상신 생생성경)

{ 서신 차용 } 사도행전 22장 1-3절 ……. [1] “형제이자 동료요 아버지 되신 분들이여 지금 여러분 앞에서 내가 설명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2] 히브리어로 말하는 것을 듣더니 사람들은 한층 조용해졌다 이어서 말하였다 [3] “나는 유대인입니다. 킬리키아 타르소스에서 태어났지만 이곳 성에서 자랐습니다 …

행 23장 6절 ……. [6] 파울로스는 수네드리온(*공회)의 한쪽이 삿두카이오스이고 또 한쪽은 파리사이오스라는 것을 파악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파리사이오스이며 또 파리사이오스의 아들입니다 내가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소망 때문에 소송을 당하는 것입니다. …”

행 24장 10-12절 …… [10] 총독은 [파울로스]에게 발언하도록 고갯짓을 하자 파울로스는 대답하였다 “수년 전부터 [각하]께서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해 변호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11] 내가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올라간 지 12일 밖에 되지 않은 것을 [각하]께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12] 저들은 내가 어떤 사람과 논쟁하거나 무리를 선동하는 모습을 성전은 물론이고 수나고게(*회당)나 도시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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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1950년 평양에서의 일입니다. 유엔군과 국방군이 평양에 진주한지 며칠 되지 않아, 시골에 피난해 있었던 저희 가족은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평양 종로통은 완전히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고, 시가지 전투에서 숨진 전사자들의 시신이 여기 저기에 치워지지 못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희 가족들이 안방에서 서녘의 햇볕을 받으며 이른 저녁상에 둘러앉아 막 첫 숟가락을 뜨나마나 했을 때였습니다. 아주 가까이서 쏘는 총소리가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사복 군인들이 저희 집에 쳐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뜰에서 저희 온 식구들에게 총을 겨눈 자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왔다. 아무아무 인민군 장교가 너냐?” 하면서 저희 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일어나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아닙니다. 제 남편은 목사입니다. 공산당이 아니에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뒤끝을 따라, 저도 아버지 앞에 서서 대문 밖으로 나가기까지 “아버지는 목사님이에요”를 계속 외쳤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소란스런 총소리를 듣고, 대문을 열고 기웃거리며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서북청년단)은 대문 밖으로 나오지 말라면서 동네사람들 쪽으로 총을 빵, 빵 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덟살배기 저를 밀쳐 버리고, 아버지만 두 손을 뒤로 묶어서 어디론가 끌어갔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저희 옆집에 살던 인민군 장교를 잡으러 주소를 잘못 알고 온 ‘서북청년단’ 이었습니다. 그들의 취조실까지 끌려가 저희 아버지는 “나 만큼 유엔군을 기다린 사람이 없을 거요. 왜 내가 죽일 사람이라는 거요? 죽음이 두렵진 않소. 하지만 후회할 거요. …” 하면서 그간의 목사로서 공산 치하에서 겪었던 일을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취조를 당하고 있을 때에, 문이 활짝 열리면서 ‘주민대장’ 이라면서 요란스럽게 들어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양노회 임원이었던 장로님이 서북청년단 주민대장이었답니다. “아이구, 이 목사님께서 여긴 웬 일이십니까?” 하더니 대번에 포승을 풀어 보내 주더랍니다.

( 2 )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자마자, 그가 왕년에 소속했던 유대교 체제 팀에게 살벌하게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자기 변론을 해야 했습니다. 22장에서는 회심했던 동기를 설명했고, 23장에서는 왜 공회에까지 불려오게 되었는가를 말해야 했고, 24장에서는 로마총독에게 고발 당한 자초지종을 혐의자 자신이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헛짓이 아니었습니다. 곳곳에서 이렇게 자기 변론을 하는 동안에, 그의 음성을 듣던 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예수님의 문두드림(계 3:20)이 전해지고 있었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 복음이 그들의 마음밭에 한 톨 씩, 한 톨 씩 심기워졌다고 믿습니다.

( 3 ) 저의 보잘것없는 가설 하나가 있습니다. ‘가치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움, 자비로움, 용서, 거룩함, 하나님께 신실함, 이웃에게 신실함, 대신 죽는 일,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 이 모든 가치들은 소멸됨이 없이 세상에 남아 있어서 세상을 생명 있게 한다는 가설입니다.

뭔가 엉성한 가설 같지만, 지금껏 제가 살아온 주변에서 약간은 검토된 가설이니까 다소라도 인정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어디서 조용히 속삭인 말일지라도, 그것이 진실된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복음이 될 수가 있다는 저의 믿음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의 말과 행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신실하여, 저희 자신도 또 저희의 증언을 통하여 이웃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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