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복음 } 마테오 복음서 19장 16-22절 …. [16]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선행을 해야 합니까?” [17]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행을 물으시오? 선량하신 분은 한 분 뿐입니다. 그대가 생명의 길로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시오.” [18] 그가 또 물었다. “그 계명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셨다. “곧, 살인해서는 안 되오. 간음해서는 안 되오. 도둑질해서는 안 되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되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오.”
[20] 그 젊은이가 다시 물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모두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21]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그대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그대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그대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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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이 가난한 사람이 어디 따로 있고, 부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여 들어, 그것을 통제하느라 피난민들을 곳곳으로 분산시킨 때가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다대포국민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추운 겨울에, 외풍이 센 학교교실은 냉동고 속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침구가 없이 피난 온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교실 중앙에 이불로 성을 쌓고 있는 가족이었습니다. 무슨 피난민이 그토록 이부자리가 많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마는, 그걸 다른 가족들과 나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 부자였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저희 집이 부자라고 생각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저희 부모님을 향해 가끔 하는 말이 ‘아들 부자’ 라고 했습니다. 아들만 많이 두고 가난하니까 위로하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나 우리 형제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은 없었습니다. 가난의 숙명을 즐기기라도 하듯, ‘영구한 피난살이’ 의식을 가지고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핸가, 회의차 제 처와 함께 필립핀 수도 마닐라에 갔을 때였습니다. 미대사관을 마주 보는 호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루 일정을 끝내고, 저희는 어두운 시내를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낮에는 안 보이던 사람들이 꽤 많이 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천막도 아닌 널따란 헝겊을 펼쳐 끈으로 매달아 놓고, 그 밑에서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그 헝겊 밑에서 밤잠을 자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수 없이 밤거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기아선상에 있는 세계의 어린이들을 하루 한 끼라도 먹이자는 구호단체에 월 얼마씩의 구호금을 보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 30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깨달은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마음속에 가졌던 생각, 곧 나는 평생 살아도 부자일 수 없다던 생각은 어느덧 사라지고, 저도 별 도리없는 부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부는 상대적입니다. 절대적 가난도, 절대적 부도 없습니다. 다만 누구와 비교하느냐에 따라 정해질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라’고 하시는 말씀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오케이, 그는 예수님께 합격이 된 사람일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가 모두 부자인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재물도, 기회도, 지식도 이웃과 나누고, 특별히 먼저 믿은 복음을 나누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