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표준새번역 개정판)
{ 복음 } 누가복음서 12장 49-53절 ….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 = * ( 1 ) 불을 지르러 왔다니? 그러면 ‘방화범’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압니다.
한국동란이 있던 해에, 저는 부모님을 따라 평양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다대포 뒷산은 가파롭게 솟은, 소나무들로 우거진 산입니다. 다대포국민학교가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피난민 어린 철부지들은 그해 겨울, 추운 마루방(교실)에 앉아 있지 않고, 나가서 산에서 삭정이를 긁어오는 일을 했습니다.
삭정이 가운데도 소나무 삭정이와 마른 솔잎은 화약처럼 잘 타서, 산마루에서 솔가리를 긁어서 안고 내려오면, 밥을 짓던 어머님들이 착하다며 무척 칭찬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산에서 솔가리를 긁어놓고, 모닥불이나 쪼이다가 내려가자며, 가져온 성냥으로 불을 피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피난민 아이들에게 얼마나 재미있었겠습니까?
불이 크게 타오르지 않도록 조심조심 불을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불붙는 솔가지가 탁탁 소리를 내더니, 불이 마른 풀숲으로 옮겨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금세 일대에 번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윗도리를 벗어서, 정신없이 불붙는 풀숲을 따라가며 불을 끄느라고 야단법석했습니다. 열 명 남짓의 어린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간신히 불을 껐습니다. 그러노라니, 온 몸에서 열이 부쩍 났고, 우리는 불에 그을린 저고리를 입지도 못하고 산에서 터덜터덜 내려왔습니다.
정말 큰 불이 날 뻔했습니다.
( 2 )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은 ‘영적 불’이었습니다. 하늘 나라 복음을 전한 것이, 세상의 기득권자들의 강한 저항 때문에, 각 가정에서 자녀가 복음을 믿게 되면, 집안 어른들이 가정의 무사함을 위해 그 자녀들에게 ‘절대로 그 종교집단에 다시는 가지 말아라’ 하고 경계를 하게 마련입니다.
이래서 온통 집집마다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데, 복음을 믿게 된 사람이 있는 집안 치고, 평안한 집안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록 세상이 싸움판이 된다 할지라도, 이 싸움(대결)은 당연한 것이고, 이 싸움을 거쳐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온 세상이 하늘 나라 복음으로 변화되어 이윽고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영적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세상은 평안치 못한 ‘분열과 다툼’의 시기를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은 당연합니다.
( 3 ) 저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을 구경했습니다. 교회 내의 이익집단(?)끼리 서로 맞붙어 싸우는 현장도 여럿 보았습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청년층과 기성세대들의 대결도 보았습니다. 권위주의적 성직자와 그들의 변화를 바라는 성도들의 대결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교회 주변의 이 모든 싸움들은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은 남을 공격하는 불이 아니라, 공격을 당하는 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위한 불도 아니고, 생존을 위한 불도 아니고, 진리와 비진리 간의 대결이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도 예수님께서 지르신 영적 불을 이어받아, 사탄의 어두운 세력 아래서 죽어가는 인간들을 위해,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사람, 진리의 불로 승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