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개역개정판)
{ 조도 정과 } 이사야 42장 1-4절 ….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 조도 성시 } 시편 24편 7-10절 ….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 만도 2과 } 요한복음 3장 16-18절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 * 한국동란 때, 유엔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북쪽으로 진격해서 압록강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남북통일은 완성되는 줄 알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공산당 치하에서 오랜 은신 끝에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서문밖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새로이 목회를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새로운 소식은 중공군이 개입했고, 이미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고 있기 때문에, 유엔군은 후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워낙 감리교성화신학교에서 반공교수로 이름이 나 있어서, 인민군에게 붙잡히면, 바로 그 자리에서 총살 당할 대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피난할 것을 결심하고, 허리가 몹시 굽은 제 할머니에게 눈물의 작별인사를 올렸습니다. 저희 형제들이 각각 열 살, 여덟 살, 여섯 살, 세 살, 넉 달배기, 이렇게 오 형제였습니다. 여덟 살 짜리가 저였습니다. 그 다섯 가운데 어린 둘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업으셨고, 위로 셋은 걸어서 피난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서울까지만 내려가면 충분할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서울까지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성공적으로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당도하고 보니, 서울 사람들도 벌써 다 남으로 피난들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다시 수원까지 이럭저럭 도착했는데, 우리 형제들이 걸음이 느린지라, 아무래도 가족 전원이 피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최후의 단안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하고서 그것을 어머니와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수원역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수원역 앞이 상가빌딩들이 들어차 있습니다마는, 그 당시는, 폭격으로 눈에 띄는 집이 별로 없어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흙바닥 들판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애타는 격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어서, 아버지는 맏아들인 제 형만 데리고 따로 안전한 남쪽으로 냉큼 피난했다가, 전쟁 후에 수원으로 올라와 찾을 터이니, 어머니는 졸망졸망한 어린 것들 넷을 데리고 수원에 남아서, 수원역 근처에서 김밥장사 하면서 살아남아 있으면 나중에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시내에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시계포에 가서 회중시계를 팔아 그 돈을 어머니에게 내놓았습니다. 어머니는 죽어도 따라가다 죽겠다며 같이 가자고 애걸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쪽에 붙어야 하냐, 아버지 쪽에 붙어야 하냐를 생각하면서, 두 분 사이에서 두 분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결론은, 어머니의 의견이 끝내 받아들여져서, 함께 갈 수 있는 데까지 동행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걷기도 하고, 밤에만 달리던 화물기차(당시 ‘피난민열차’)를 얻어타기도 하며 대구까지 갔고, 거기서 다시 부산까지 …, 그후 제주도까지 가는 유엔군 상륙선, LST(Landing Ship Tank, 3천 톤급)를 타고 제주도 화순항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 LST가 상륙할 수 있는 항구가 화순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함께 하선한 2천여 명의 피난민이 화순리 주민들 집에서 하룻 밤 신세를 지고, 다음 날 아침 일제히 화순을 떠나 도보로 서귀포까지 이동했습니다. 그 날은 눈발이 부슬부슬 날리던 1월 초순이었습니다.
피난민 대열은 60리 길을 말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숭실중학교 시절에, 선교사선생님이 성악을 해 볼 것을 권한 바도 있을만치, 노래 잘하는 38세의 목사였습니다. 아버지는 줄곧 노래를 부르며 서귀포로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마치 ‘걷는 노상음악회’를 연 듯했습니다.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ens)의 합창곡 ‘유랑의 무리’ 의 주선률을 불렀고, 아버지의 애창곡 ‘모란봉가’와, 아버지가 작곡한 ‘파도의 정’, 찬송가에서 여러 곡들, 그리고 특별히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렸던 노래가 헨델의 오리토리오 ‘메시아’에서 합창곡 ‘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의 주선률이었습니다. “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뉘시냐? 전쟁에 용맹하신 주 여호와시로다.”(시 24:7-10)
이 곡들을 힘찬 바리톤으로 한라산 기슭을 돌고 돌며 노상에서 부르던 아버지의 등에 업혀, 서귀포까지 갔던 아버지의 네째 아들 이건용이 하나님의 은혜로 후일 우리나라의 ‘기념비적’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과, 기독교인이 태반이었던 피난민들의 영혼의 눈은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하늘 행차, 곧 구세주의 강생, 수난, 부활, 승천, 보좌에의 등극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비록 전쟁의 우여곡절과 피난길 행차 속에서도 하늘나라의 영원한 문이 드높이 열리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의 입성과 등극을 바라보며 매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