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복음 } 마르코 복음서 3장 13-19절 …. [13]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스스로 선택하신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왔다. [14]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을 자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시며, [15]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 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테요,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그리고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 = * ( 1 )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둘 만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의 휘하에서 ‘전도훈련’을 받던 사람의 수가 70명이었다고 했습니다. 또 누가복음 8장 1-3절에는 남자 제자들 외에 여러 명의 여성 추종자(followers)들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부활-승천 이후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제자-추종자들의 수가 모두 120명이라고 했습니다.(행 1:15) 열두 제자들의 수의 열 배가 되는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를 통상 열두 명으로 꼽고 있는 것은, 복음서에서 열두 명이 제자로 ‘임명되었다’는 것(막 3:16-18, 마 10:2-4), 그 중 한 명의 결원(가룟 유다)이 생겨서, 이를 보충하려고 맛디아를 선출한 사실(행 1:15-26)에서, 열둘이라는 숫자의 보전이 중요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의 수가 왜 열둘이 되어야 하는지를 증명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주석가들이 사도행전 서두(1장)의 맛디아 사도의 보선의 배경을 설명하기를,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복음화를 위해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열두 사도의 수를 채우는 것은, 남아 있는 열한 제자의 우선적 사명이었기 때문인 듯하다고 설명함에 따라, 이를 수긍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열두 제자로의 수치상 제한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 2 ) 예수님의 제자 임명은 선착순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제자가 되기 전 지니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나 그들의 ‘주특기’(남달리 뛰어난 기술이나 경력)를 감안하지도 않았고, 경건생활을 얼마나 힘썼는가도 묻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반역의 기질이 엿보이는’ 가룟 유다마저 열두 제자 범주 속에 맞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아무 기준도 없이 제자가 되었단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인간이면 우리 주님께서 누구든 제자로 받은 듯합니다. 이 황당한 기준이 주님의 제자임명의 원칙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원하면 다 나의 제자로 받겠다. 출세할 욕심으로 오는 자도 받겠고, 먹고 살기 위해 신청해도 받겠다. 하지만 끝날에 보자.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 너희 인격이 변화하여 내 일꾼이 되어 주려무나. 진정 제자의 자리를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 이것으로 나의 제자인가를 판가름하겠다.’ 이것이 주님의 기준이 아니었을까요?
가룟 유다는 자기 가고 싶은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도 주님께서 수난을 받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꿈은 다 깨어지고 말았다’고 낙심한 듯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남아있는 미련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주신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와 그의 마음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사랑의 맹약을 받아 내신 것입니다.
그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참된 제자의 길을 갔습니다.
( 3 )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입니까? 아직도 제자로의 변화를 기다리는 중입니까? 아니면 성령님의 인도하심 앞에서 항상 반신반의하며 주저하는 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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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믿음의 사람 >> 카독 (Cadoc, 497 ? – 577) : 수도원장 카독은 5세기 말 웨일스 남동부에 있던 ‘궨트’라는 제후국에서 왕실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타탄(Tathan)의 수도원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그는 수도자가 되어 얀카르판에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카독의 수도생활은 대뜸 영국의 전체 수도원으로 파급되었습니다. 매일 수차례의 기도예식, 의식주를 위한 근로, 그의 성서연구와 복음전도의 열정이 다른 수도단체에도 새 힘을 주게 되었습니다.
547년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창궐하고 있던, 황달을 동반한 페스트가 퍼져, 인구가 크게 감소될 정도로 피해가 컸던 시기에, 그 상황을 나름대로 후세에 전한 것은 수도단체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카독은 웨일스를 떠나 브리튼 지방으로 가서 교회를 설립하고 말년을 보냈습니다.
카독 수도원장은 80세가 되던 577년, 교회 입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군인에게 이유도 모를 살해를 당해 절명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저희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지금 저희의 삶이 제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삶인가를 반성합니다. 저희의 복음증거, 저희의 이웃섬김, 이것이 제자로서의 삶의 기준에 도달하는가를 반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