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로 회심 기념일,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구약 차용 } 사도행전 22장 6-16절 …. [6] “길을 가다가 오정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나타나 내 주위에 두루 비쳤습니다. [7] 내가 땅에 거꾸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8]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9] 그 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신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주께서는 ‘일어나서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거기에 가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못 보게 되어, 같이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거기에 사는 모든 유다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곁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이 띄어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 때 아나니아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 [15] 당신이 보고 들은 일을 그분을 위해서 모든 사람 앞에 증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어서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리시오.’ ”
{ 서신 } 갈라디아 1장 13-17절 …. [13] 내가 전에 유다교 신자였을 때의 소행은 여러분이 다 들었을 터이지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습니다. 아니, 아주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 [14] 나는 그 때 내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1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16]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 = * ( 1 ) 사도 바울로의 자기 인식은 마치 자기가 역사의 중심,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서술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은, 그곳이 위도상 어느 곳이든 간에, 그곳이 역사의 중심이고, 우주의 중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신랑-신부가 결혼식 날,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고,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서 계시는 한, 역사의 중심에서, 우주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나라 일의 주인공들이 되는 것입니다.
( 2 ) 사도 바울로의 두 편(행 22장, 갈 1장)의 신앙간증이 오늘 묵상의 본문입니다. 이 본문 속에서, 그의 자기중심적 역사인식에 의아해 하기보다, 우리들 역시 그 때 그 장소에서 같은 경험 속에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이 본문에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가 ) 사도 바울로는, 자기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 개입을 하고 계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세 군데(행 9:, 22:, 26:)에서, 바울로의 다마스쿠스 도상에서의 경험을 똑같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바울로에게 외치시면서 강렬한 빛으로 임하십니다. 그 때 “주님,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바울로의 질문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자렛 예수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토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심각한 논쟁도 없었습니다. 다만 일방적인 예수님의 지시만이 있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로가 동의하는 대답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무런 항변 없이, 분부 받은 대로 다마스쿠스로 들어가, 하느님의 사람 아나니아를 만납니다. 아나니아가 전한 것은, 세계복음화의 거대한 사명이었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설계였습니다.
이로써, 다마스쿠스로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려고 체포하러 가던 바울로가, 예수님의 초월적 개입으로, 새로운 사명에 돌입하게 됩니다.
나 ) 사도 바울로는, 그간에 그의 마음 속에 풀래야 풀지 못할 갈등을 풉니다. 그것은 그가 스테반을 처형한 이후로 마음 속에 그를 괴롭히고 있던 문제였을 것입니다.(행 7:54-60)
돌무더기 속에 죽어가던 스테반이, 놀랍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던 용기, 평안, 확신의 신앙,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소통, 이런 것들은 그가 속하고 있었던 바리새파 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요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바울로가 스테반과 똑같은 예수님과의 소통을 마치자, 그의 마음 속에, 확신과, 하느님의 역사개입의 확증, 그리고 세상의 그 무엇도 감당해내지 못할 용기와 평화를 맛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잠시동안 시력을 잃었어도, 동행인의 도움을 받아 다마스쿠스로 들어갔고, 새로운 순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 ) 사도 바울로는, 그가 오랫동안 몸 담고 있었던 유다교 율법주의가 지니고 있던 문자주의의 모순, 형식주의의 모순에서 떠나 율법의 법정신을 드러내시던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다마스쿠스에서의 며칠 동안에 완성된 이해는 아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로가 아라비아로 가서 수년간의 말씀묵상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결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속역사는 사도 바울로에 의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 그의 공생애, 수난, 부활을 통하여 완성되는 기독교신학의 프레임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라 ) 사도 바울로는, 그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던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 15:9) ‘죄인의 괴수’(딤전 1:15)인 자기를 이방인(온 세계)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혜’ 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울로 개인의 생애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바울로는 이것을 사사로운 개인의 경험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주총체적인 하느님의 구원역사였기 때문에, 이를 인간의 일이라고 보지 않고, 하느님의 역사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진척해 나가시는 일들이 비록 규모로는 작은 일일지라도, 그것은 사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그 일들을 통하여 ‘우주대의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역사의 중심에 있는 일’ 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통하여 우주의 중심, 역사의 중심에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기도> 주 하느님, 성령의 인도 가운데 살 때면, 비천한 저희일지라도, 역사의 중심, 우주의 중심에서 살게 됨을 바울로 사도의 경험을 통하여 깨달으며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 영예로운 역사의 여정을 걸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