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19일, 해리엇 몬셀 기념일> …… (이상신 생생성경)
{ 만도 성시 } 시편 82편 1-8절 …. [1] 엘로힘이 하나님의 총회 가운데 좌정하시어 엘로힘이 심판하시도다 [2] 너희가 언제까지 불의한 재판을 하며 악한 자들의 얼굴을 치켜주는가 [3] 연약한 자와 고아를 변호하고 가난하고 부족한 자에게 정의를 행하며 [4] 연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구하고 악한 자들의 손에서 빼낼지어다 [5] 저들은 지식도 없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 가운데 다니니 땅의 모든 기반들이 흔들리겠구나 [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엘로힘이며 모두 지존자(벤 앨욘)라 [7] 그러나 아담처럼 죽으며 지배자 중 한 사람처럼 쓰러지리라” [8] 엘로힘이여 일어나사 땅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들이 주의 소유가 되리이다
* = * 해리엇 몬셀(Harriet Monsell, 1811 – 1883) 여사는 19세기 불우여성들과 고아들의 복지사업을 수도원 형태로 일으킨 성공회 여성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영국 남부 윈저 지방의 클루어(Clewer)에서 성장했습니다. 본래의 성씨는 오브라이언(O’Brien) 이었으며, 가족은 신앙심이 깊은 성공회 집안이었습니다.
1839년에, 성공회 사제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챨스 몬셀(Rev. Charles Monsell)과 결혼하였지만, 남편이 사제 서품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치료제가 개발되지 못해,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해리엇은 숨져 가는 남편을 자신의 품에 안고 임종을 지켰습니다.
남편을 하늘 나라로 보내던 날, 그녀는 하염없이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을 그녀의 품에서 데려가시는지를 계속해서 여쭈며,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녀는 그 시간이 ‘자신이 성화(하나님께서 거룩한 동기부여를 하심)를 경험하던 시간이었다’고 후일 회고하고 있습니다.
남편을 사별한 후, 그녀는 옥스포드 운동(19세기 영국 성공회의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 그리고 고아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녀의 지표는 관념적 사랑이 아닌, 실천적 사랑, 곧 수혜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도와주는 사랑의 운동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1851년에 옥스포드 운동에 참여한 성공회 사제들과 더불어 수도단체 형태의 생활을 시작했고, 이것이 나중에 ‘성마리아자매회(또는 클리어웰 홀 자매회)’로 발전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교회여성들이 기도와 섬김, 교육, 간호활동, 사회봉사를 병행하는 공동체로서, 19세기 성공회 내의 여성 수도회 부흥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해리엇은 성마리아자매회의 초대원장으로서 뛰어난 리더쉽과 영성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영국 만이 아니라,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등지에까지 활동을 뻗쳐 나가, 곳곳에 학교, 병원, 고아원을 건설하여 운영했습니다.
1880년에 이르러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아, 폭스톤(Folkestone)에 있는 은둔수도처로 이동해서 지내다가 1883년 부활주일 날에 별세했습니다.
그녀는 말년까지 성공회 내의 모든 개체교회에까지 활동을 펼치면서, 신도들로 하여금 때때로 수도공동체를 체험하도록 하여, 여성 수도자들을 널리 확보하는 길도 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기도와 봉사를 조화있게 수도생활에 결합시킴으로 기도로 봉사할 힘을 얻게 하고, 봉사로 기도할 제목을 얻게 인도하는 실질적인 효과를 보았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들의 기도가 허공을 치는 기도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며, 저희의 기도가 구체적일 수 있게 하시어, 사랑을 실천할 힘을 얻으며 나날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