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4주일, 본문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복음 } 루가복음서 15장 11하-32절 …. [11] …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4]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15]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7]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18]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25]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 = * ( 1 )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이 아버지에게 많은 아들 딸들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야기의 구성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다만 두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상황을 설정합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두고 마음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직 아버지가 죽지도 않았는데 재산을 분할상속을 해 달라고 합니다. 불효자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자식이 상팔자’ 라는 논리로 풀어가지 않습니다.
비록 둘째 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와서 가세가 다소 기울었어도, 가난해진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건강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기특해 하면서 기뻐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풍조로는 ‘차라리 말잘듣는 반려견을 키우는 것이 훨씬 맘 편하다’는 대체안을 더 좋아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이 오죽하면 그런 결론을 내렸겠나 싶기도 하지만, 인간의 생명에는 다른 대체안이 있을 수 없는 고귀함이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2 )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가서 “내가 하느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앞으로는 아들이라고 하지 마시고, 저를 종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빌어 볼 생각을 합니다. 또 정작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렇게 말합니다.
맏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다가, 음악소리가 들려오므로 종을 불러 왜 이렇게 야단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종의 대답이 ‘당신 동생이 죽지 않고 돌아왔다고 아버지께서 이렇게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때 맏아들은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속이 상한 아버지께서 바깥으로 나와 맏아들에게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는데 너도 기뻐해야 하지 않겠니’ 라며 충고합니다. 그때 맏아들이 하는 말이, ‘창녀들한테 빠져서 재산을 날리고 돌아온 아들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해 주고, 보십시오, 날마다 ‘종처럼’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일한 나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하지 않은 아버지의 편애를 좀 반성해 보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 아버지가 ‘종처럼’ 일하라고 한 적이 있단 말입니까?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이제부턴 나를 아들로 취급하지 말고 종으로 취급해 주세요’ 라고 아무리 졸랐어도 끝끝내 그 부탁은 관철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 3 ) 자식들의 사고방식이 잘못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슬픕니다.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먼저 살아본 사람입니다. 그의 아들들이 바깥세상에 나가서 듣고 온 유혹의 말들은 이미 아버지도 들은 말이었고, 그 유혹의 말들이 이루는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는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헛소문을 아버지가 어떻게 검증하고 있는지에 그의 아들들이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는 낡은 세대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됐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들이 ‘아버지’로 호칭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대단치 않게 여기는 교회에는 이 이야기에서 보듯 두 아들을 닮은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교회를 쉽게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교회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기도로 묻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지금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가 그런 교회는 아닌가 물어 봅니다. 그래서 기도로 하느님의 뜻을 항상 묻는 교회가 됨으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의 신실한 자녀들로 안내하는 교회가 되도록 애쓰시기 바랍니다.
<기도> 주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저희의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어 있지 못함을 애통히 여깁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기도로 항상 소통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사람이나, 또는 몸은 아버지 집에 있어도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는 이들이 없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