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토요일,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조도 정과 } 욥기 19장 21-27상 …. {21] 벗들이여, 불쌍하고 가련하지 아니한가?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는데 [22] 어찌하여 자네들마저 하느님처럼 나를 구박하는가? 그만큼 헐뜯었으면 직성이 풀릴 만도 하지 않은가? [23] 아, 누가 있어 나의 말을 기록해 두랴? 누가 있어 구리판에 새겨두랴? [24] 쇠나 놋정으로 바위에 새겨 길이길이 보존해 주랴? [25]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26]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27]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 = * 예수님께서 평소에,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과 죽은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신 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마 16:21) 라고 하셨고,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머지않아 사람들에게 잡혀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 17:22-23) 라고 분명히 두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부활의 예고가 마가복음(막 8:31)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그 엄숙한 부활 예고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의 한 으슥한 곳에서 숨어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요 20“19) 라고 했습니다.
측근 제자들 열 한 사람은 그렇게 지냈다고 치고, 아마도 ‘70 또는 72명의 제자 범주’(눅 10:1 참조)에 속했던 이들로 보이는 ‘제자 두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아예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24:21-24) 그들은 그간의 예수님과의 생활을, 다분히 후회스럽게 여기듯이 말하면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열 두 제자의 하나인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말하는데도, 믿기를 거부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고 부인하고 있었습니다.(요 20:25)
평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여제자들 몇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때 부활하신 주님을 뵈러 갔던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시신에 도유를 해 드리러 갔던 것이 확실합니다.(막 16:1-3)
부활하신 예수님의 등장은, 모든 인간의 몰이해와 불신의 벽을 부수고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간 극악한 인간들은 부활 같은 초월적인 일은 세상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비록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일지라도 부활이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로 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홀로 진행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인간들은, 부활이 인류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아예 모든 책에서 지워버리기를 바라고 있고, 또 예수님의 정신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마저도, 예수님의 부활을 쉽게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친히 진행하신 이 부활의 사건은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성취’로 길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기도> 주 하느님, 저희 불신의 인간들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제한하면서, 엄연한 역사적 사건을 역사에 없었던 일로 여기고 있음을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의 부활을 인류를 구원하신 확증임을 믿고, 이 믿음으로 저희가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