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오 기념일, 말씀 묵상> ……………… (성경전서 새번역)
{ 조도 정과 } 다니엘서 3장 13-18절 …. [13] 이 말을 듣고서 느부갓네살 왕은 노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데려오라고 명령하니, 그들이 왕 앞에 붙들려 왔다. [14]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들어라. 너희가 참으로 나의 신을 섬기지 않고,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느냐? [15] 지금이라도 너희가 …. 내가 만든 신상에게 엎드려 절을 할 마음이 되어 있으면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즉시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아뢰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17] 불 속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18]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
* = * 오늘은 아타나시오(Athanasius, 296 ? – 373) 성인의 기념일입니다. 이 성인은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 그리고 모든 개신교회가 모두 기념하고 그의 업적을 기립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면, 그가 작성한 니케아 신경(Nicene Creed)과 아타나시오 신경(Athanasian Creed)의 고백문의 토대 위에서 사도신경을 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타나시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가 된 알렉산더라는 학자에게서 희랍철학과 시가를 공부하였는데, 아타나시오의 학구열이 남달랐습니다.
313년에 그는 친구 안토니오(후일에 성인으로 추대 받음)와 함께 사막지대로 들어가 피정기도를 하면서 신학수업을 했고, 319년에 부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아리우스(256-336)라는 사제가 있었는데, 그는 다분히 인본주의적 기독론을 펼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의 인간이었으므로 ‘영원하신 하나님’ 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고, ‘성부 하나님과 대등하시다’는 말도 틀린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언변이 능하여 사람들을 곧잘 감복시켰고, 또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논쟁하기를 좋아하여, 그가 끼치는 악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주교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추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앗시리아의 가이사랴와 니코메디아 지방으로 가서 똑같은 짓을 벌이며 교회를 와해시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전 지중해 연안 지방의 모든 교회들이 ‘아리우스파’라는 인본주의 신학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교회로 갈라져 싸우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각 나라의 통치자들이 자기들의 통수권을 확대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리우스파를 이용하고 있어서 혼란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이런 혼란을 저지하고 교회를 성경진리의 터전 위에 서게 한 사람이 아타나시오였습니다. 그는 ‘니케아회의’(325년)가 개최되던 해에 불과 29세의 청년 부제였지만, 주교, 사제, 부제들을 망라한 3백 여명의 교회대표들에게 조리정연한 기독론을 펼치어 교회를 이단사설에서 수호하는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의 기독론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였는데, 요한복음 1:1의 예수님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1:15-17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창조되었고…” 등의 말씀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확증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이 일이 있은지 5개월 후, 알렉산더 주교가 별세하여, 교구는 새로이 30세의 아타나시오를 주교로 선출했습니다. 그의 교구는 그를 열렬히 환영했지만, 다른 지방의 이단들은 교회파괴 행각을 멈추지 않아서, 교회의 분열상은 더욱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콘스탄틴대제와 콘스탄틴 2세는 신앙이 얕아서, 매사에 정치적으로 교회 일에 관여했기 때문에, 아리우스 파가 아타나시오 주교를 걸어 ‘살인과 마술을 행사한 혐의’를 빙자하여 고소했을 때에, 그들의 편을 들어주었고, 특별히 아타나시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반입되는 양곡을 규제한다는 헛소문으로 콘스탄틴대제에게 송사하여, 그가 10년 동안 추방을 당하게 됐습니다.
337년에 주교직에 복귀하였지만, 다시 7년을 추방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주교 재위 46년 중에서 17년을 자리를 비우게 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을 허송하지 않고, 그의 중요한 교리학 저술들을 유배지에서 완성했습니다.
그는 견인불발의 투지가 강한 인물이었고, 황제의 압박에 못이겨 정통신앙을 포기하는 지도자들이 많았지만, 그는 끝까지 바른 믿음에서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평생 신앙의 정도를 달린 아타나시오를 주셨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본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도 아타나시오를 본받는 믿음의 성직자들을 주셔서, 교회로 하여금 성경적 신앙, 사도들의 신앙에서 떠나는 일이 없게 도와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