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의 중심에 왜 사울이 있었나?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서신 차용 } 사도행전 8장 1-8절 …. [1]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그 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은 유다와 사마리아 여러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사도들만 남게 되었다. [2] 경건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를 장사지내고 크게 통곡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3] 한편 사울은 교회를 쓸어버리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끌어내어 모두 감옥에 처넣었다. [4] 흩어져 간 신도들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립보는 사마리아의 한 도시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군중들은 필립보의 말을 듣고 또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보고는 모두 하나같이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악령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병자들과 불구자들이 깨끗이 나았기 때문이다. [8] 그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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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교회가 시작된 후, 예루살렘 시내는 시끌벅적했습니다. 한참 소문이 크게 났던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 형을 당했기 때문에 끝났다 했지만,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가 부활했다”고 말하며, 흩어지지 않고, 도리어 날마다 커지고 있고, 또 기상천외의 ‘공동생활’ 이라는 것을 하면서, 새로운 화제거리가 그곳에서 매일 번져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메시아(그리스도)라고 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이라고 했으며, 그분은 장차 다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매우 겁나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반응을 했습니다. 1)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들, 2) ‘한동안 그러다가 말겠지’ 라고 무시하는 사람들, 3) ‘그런 이단자들은 빨리 소탕해야 한다’고 비분강개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호기심을 가지는 무리들(1)은 기회가 되면 초대교회를 찾아가고 싶어 했고, 보다 많은 무리들인 ‘한동안 그러다 말겠지’ 하는 사람들(2)은 무관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3)번의 무리들은 기독교인들을, <언젠가는 크게 말썽을 피울 사람들> 이라고 보고, 아예 척결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 3)번 무리들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척결>을 주장하던 제1인자가 청년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진골’인 베냐민지파에서 태어나, 율법으로는 ‘나는 하나도 흠이 없었다’(빌 3:6)고 자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 중의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안에서도 율법주의자였고, 바깥에 나가서도 율법주의자였으며, 온통 그의 생각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 만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세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율법이었고, 자기의 소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배우고, 지키고, 존중하며 살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마케도니아제국과 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나라를 살리는 길이고, 조국 이스라엘에 여명이 비쳐오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생각하기를, 말투가 흐리멍텅한 사람은 생각도 삶도 흐리멍텅하다고 봅니다. 겉모양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겉모양만 차릴 뿐이지 무슨 일에도 진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율법주의자, 곧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한 나머지, 율법주의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잔혹무도하게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처형을 일삼던 사울은 진정 하느님의 눈에 가시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기독교인들이 씨도 없이 말라버릴 기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가 대제사장의 체포영장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이 몰려 있다고 소문나 있던 다마스커스로, 이를 집행하러 가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마음 속에 갈등이 일면 일수록 그는, ‘내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흔들린 것은 몇 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런 저항 없이 죽어간 이유>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스테반의 죽음의 현장에서 자기 눈으로 본 사실 가운데, <어떻게 죽는 사람의 자세가 그토록 확신에 차 있을까>, 이 의문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또 스테반과 그의 집단에서, 예수를 메시아라고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고, 그들 집단의 소문 가운데, 여러 가지 기적들과 또 예사스럽지 않은 공동생활, 이런 것들이야 말로 수수께끼들이었습니다.

진정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역사를 구상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유대인의 엘리트인 내가, 이런 상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느님께서 분노하실 것이다’ 하고는 머리를 흔들곤 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향하신 하느님의 염려와, 율법주의에 사활을 걸었던 사울과의 맞대결이 이루어진 것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 위에서였습니다. 주님은 강렬한 빛으로 사울 앞에 다가오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외침과 함께 길을 막아서셨습니다. 사울이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주여, 당신이 누구십니까?” 이때 결정적인 주님의 대답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였습니다.

하느님께 평소 진지하게 달라붙었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예수님께서 그리 다급한 모습으로 사울에게 다가오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가오신 예수님 앞에 반사적으로 거꾸러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과연 진리의 길에 서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사울이었기 때문에, 그의 ‘진리의 순례길’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기도> 주 하느님, 저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기뻐하며 하느님을 일심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날마다 살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뵙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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