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노리치의 줄리안 기념일,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구약 } 이사야서 63장 16-17절 …. [16] 그렇지만 주님은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저희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이 저희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주님, 주님만이 저희 아버지이시고, 예로부터 주님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17]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주님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주님의 종을 생각하시어, 주님의 유산인 이 지파에게 돌아오소서.

{ 복음 } 요한복음서 5장 19-22절 ….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노니,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소.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오. [20]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스스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여러분을 놀라게 하실 것이오. [21]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낫기를 바라는 이들을 다시 살립니다. [22]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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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간은 남자가 아니면 여자이고, 여자가 아니면 남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과 녀, 성의 구분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 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남성성을 지니고 계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어머니로 표현하는 예는 볼 수 없고,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남성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위의 본문들을 참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성성을 지니신 분은 결코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성성을 지니신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여성성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한 한 여성선견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3 – 1417 ?)입니다.

그녀의 실명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줄리안’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오랜 기간 은둔수도자로 머물러 살던 곳에 있는 ‘성줄리안교회’의 이름을 따서 그녀에게 호칭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녀의 나이가 30세 때에 어떤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노리치의 한 수도원 독방에서 기도생활로 마지막 날들을 보내던 중, 하나님의 사랑을 감촉하는 신비스런 환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의 병은 놀랍게도 나아서, 40년을 더 살게 되었습니다.

후일, 그녀는 이 신비한 체험을 영어로 적어서 ‘신적 사랑의 계시(The Revelations of Divine Love)’ 라는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널리 읽히우면서, 그의 칭호인 ‘노리치의 줄리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저서의 내용 가운데 특이한 것은, 지금까지 누구의 저서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여성성으로서의 하나님 호칭, ‘하나님 어머니’라는 구절을 보게 되면서 사람들이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의 문맥마다에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과 그의 용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마치 인간들이 어머니 사랑에서부터 얻는 하나님의 성품과 흡사함을 상기시키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대부분 남성성을 지닌 하나님의 인상을 줍니다. 뭔가 엄격하고, 단호하며, 무섭고, 용맹한 하나님이시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남성성을 연상시키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점만 가지고 계시는 분이 아니고, 인자하고, 너그러우시며, 사람들을 감싸안는 분이시고, 모든 잘못을, 인간이 용서를 빌기 전에 이미 포용하고 계시는 분, 곧 남성성과는 느낌이 다른, 여성성을 지니고 계시다는 느낌이 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줄리안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 어머니’라고 하나님을 호칭했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죄가 쌓인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롬 5:20)고 하신 말씀에서, 죄는 ‘무가치’ 한 것이 아니라, ‘필요악’ 이라는 특이한 이론을 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가 있게 하신 것은 목적이 있어서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절감할 수 있었고, 구원의 갈급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많은 신학자들에게는 그저 한 수도자의 신비로운 문서로만 취급되었지, 신학책에 인용할 만한 문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6백년이 지나, 현대의 많은 여성 신학자들이 그의 저서를 인용하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수주의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의 범주를 떠나지 않았던 줄리안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인용되고 있다는 점을 여기에 밝혀 둡니다.

수도자 줄리안은 하나님의 성품을 탐구하는 데에서 ‘여성성의 하나님’이라는 남다른 추적을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그의 생애가 기억되고 있습니다. 넓은 마음의 하나님, 관용과, 끝없이 인간에게 기회를 여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점에서 줄리안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을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저희에게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 줄리안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의 귀한 묵상이 저희들을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게 하는 일은 없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관용과, 오래 참으심을 저희가 항상 기억하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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